<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년-1915년)고난의 일상 중에도 감사를 노래하며 천국에서 주님 볼 날을 사모하는 삶 “성부의 집에서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년-1915년)는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의 영원하신 기업>,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등과 같은 감동적인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위의 구절은 그녀가 노년인 72세에 작시한 ‘왕의 궁전 안에서’를 바탕으로 한 찬송가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의 한 구절입니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패니 크로스비는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며 남들처럼 일상적인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어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살았고 그 중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헤아릴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감사로 충만했고 96세의 생을 사는 동안 만여 편이 넘는 찬송시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고 해도 받지 않으렵니다. 하늘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것인데, 이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오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고린도전서 13:12 - 패니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 남동부 푸트남(Putnam County)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영국 청교도 가문의 존 크로스비(John Crosby)이고 어머니는 머시 크로스비(Mercy Crosby)입니다. 어머니는 막 태어난 아이의 눈에 고름 같은 이물질이 끼어 있는 것을 봤지만 의사가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아 안절부절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빠 조셉의 도움으로 우연히 마을에 머물게 된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합니다. 의사는 겨자습포제를 사용해 아이의 눈에 갈색 빛을 띤 점액제를 넣었는데, 이후 눈의 검은 부분마저 거의 다 사라지고 결국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 됩니다. 태어 난지 6주가 되던 무렵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해 가을 아버지는 중병에 걸려 며칠도 안되어 세상을 떠납니다. 써얼, <패니 크로스비>, 1906년 여러 해가 흘러 패니는 뉴욕에서 콜롬비아 대학병원 내외과 과장인 발렌타인 모트(Valentine Mott) 박사와 그의 동료 안과전문의 에드워드 델라필드(Edward Delafield) 박사의 진찰을 받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의료 과실로 인해 회복될 수 없게 눈을 망쳐버렸다고, 시신경이 대부분 파괴되어 앞으로도 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슬퍼하는 패니의 어머니를 위로하던 할머니는 선하신 주님은 패니에게 더 좋을 일을 주실 것이라고, 그분만을 신뢰하라며 격려합니다. 패니 또한 평생 그 의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는데, 패니는 1903년에 쓴 글에서 자기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눈을 잃게 한 그 가련한 의사는 이내 이웃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아마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그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겠다. 이 의사는 내가 시력을 잃어버린 그 사건 이후 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살면서 여러 가지 슬픔을 겪었지만, 그 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내 눈을 멀게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거듭거듭 하고 싶다. 혹시 여러분이 그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을 전해 주길 바란다.나는 왜 그 의사가 엄연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그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지 않을까? 이유는 많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하나는 내가 눈이 먼 것이 의사의 과실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실수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내가 평생 육신의 흑암 속에서 살더라도 이를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잘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내 시선을 잡아끌었을 온갖 흥밋거리와 아름다운 것들을 쳐다보는 데 마음을 빼앗겼다면 나는 수천 곡이나 되는 찬송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로버트 모건(Robert Morgan), The Promise, 박규태 역, 『절망을 뒤집는 하나님의 새끼손가락』(국제제자훈련원, 2010년), 140-142쪽.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함패니가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건강한 성품과 인격의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는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의 역할이 컸습니다. 어머니가 21세에 남편을 잃고 가정의 생계를 위해 도시로 나가 일을 하면서 패니는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패니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산과 강을 다니며 온몸으로 느낀 자연은 후에 시인으로 풍성한 감성을 담은 표현을 하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통해 성경 이야기를 많이들은 패니는 성경을 잘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우게도 됩니다. 그녀가 수많은 찬송시를 쓰는데 밑거름이 된 이런 경험에서 보듯이 할머니는 앞을 볼 수 없는 손녀의 눈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 사랑하는 할머니가 1831년, 5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패니에게 한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저 높은 곳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할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가진수, 『영혼의 찬양 전도자 패니 크로스비』(아이러브처치, 2006년), 85쪽.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6 - 할머니의 이 한 마디는 패니의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뉴욕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시기인 1849년, 뉴욕을 휩쓴 콜레라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주 만에 1천여 명의 사람이 죽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패니는 한 집회에 참석합니다. 그 때 그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 회심을 경험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고백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그 때의 경험을 기록합니다. <연설하는 패니 크로스비>, 1906년 “1850년 11월 21일. 사랑하는 엄마, ... 지난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콜레라 전염병은 무서운 악몽과 같았어요. 사실 병이 들고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어요.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할머니를 만나러 올 수 있겠지?” 그러나 저는 대답을 할 수 없었어요. 저는 찬송가를 듣는 순간, 예수님께서 날 위해 그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것을 깨달았어요! 나는 일어나 외쳤어요. “주님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그 때 갑자기 내 영혼이 하늘의 빛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어요. 저는 이제 새 삶을 찾았어요. 엄마의 기도와 할머니의 기도가 응답되었어요. 당신의 사랑하는 딸, 패니.” - 가진수, 『영혼의 찬양 전도자 패니 크로스비』(아이러브처치, 2006년), 159-161쪽. 천국에서 새롭게 시작될 삶, 그곳에서 다시 만날 사랑하는 할머니 그리고 밝은 눈으로 보게 될 주님에 대한 소망은 고난의 시간 중에도 감사하며 매일의 삶을 소명 안에서 감당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 만날 날을 기쁨으로 준비하기그녀는 평생 수많은 시와 찬송가를 썼는데 다양한 필명을 사용해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약 1만 2천 편의 찬송가를 썼을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사역에 함께 했습니다. 그녀는 86세의 나이에도 한 해에 약 50편의 찬송가를 썼습니다. 1914년 심장마비로 고통을 받을 때에도 사역을 지속했고, 의사가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고 말했을 때까지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뻐하며 자신의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패니는 죽음을 준비하며 유언장에 자신의 묘지에 비싼 묘석을 절대 사지 말 것과 그 돈을 브리지포트 기독교 단체에 모두 기부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만약에라도 친구들이 자신을 추모해 기금을 모은다면 기독교 병원을 짓거나 노인들을 위한 집을 구하도록 부탁했습니다.<86세 패니 크로스비>, 1906년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2:7 - 패니는 보지 못하는 것에 눈물짓거나 한숨 쉬지 않겠다면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열정적으로 찬송가 작사를 통해 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1915년 2월 12일 전날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밤 9시에 딸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친구에게 편지와 위로의 시 한편을 받아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바라고 소망하던 주님 얼굴을 뵙는 그 날을 맞이합니다. 그녀가 작사한 찬송가 <주가 맡긴 모든 역사>의 일부입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맞을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의 못 자국을 보아 알겠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