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죽은 어머니와 어린이>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시간을 지킨다는 것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동그랗게 뜬 눈과 홀쭉한 뺨, 비명을 지르는 모습의 죽은 사람을 연상시키는 얼굴이 등장하는 유명한 그림 <절규>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년)의 작품입니다. 그는 죽음과 연관된 슬픔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여럿 남겼습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5세의 어린 나이였을 때 어머니가 죽습니다. 이때 겪은 큰 상처를 이 그림 <죽은 어머니와 어린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뭉크가 겪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에드바르 뭉크, <죽은 어머니와 어린이>, 1897-1899년) 그림에서 보듯, 침대 위에 죽은 어머니가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중심은 어머니가 아닌, 그 앞의 한 소녀처럼 보입니다. 형태도 크고 색깔도 더 선명합니다. 주변 인물들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윤각만 대략 그렸는데, 이 소녀는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얼굴도 보다 선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소녀가 뭉크의 누이 소피라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림에서 소피가 죽은 어머니가 아닌 관람자를 보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보고 있는 소피의 등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보이도록 그렸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듯한 얼굴 모습은 그녀의 마음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에 나오는 그 표정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뭉크 자신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에 주변 사람이 겪는 충격이 이와 같습니다.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어린이>, 1899년) 이 그림과 비슷한 소녀의 모습을 그린 <죽음과 어린이>에서도 같은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귀를 막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려는 듯,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현실을 부정하려는 어린 소녀의 표정이 눈에 뜁니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부인하는 모습은 그만큼 더 큰 절망과 슬픔을 표현합니다.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생사학(生死學)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죽음에 이르는 5단계로 설명하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하나입니다. 사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변화하는 감정 상태이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 <죽은 어머니와 어린이>에 등장하는 소피도 15세가 되던 해에 죽는데, 그때 뭉크의 나이는 14세였습니다. 그림 <병실에서의 죽음>은 소피가 죽던 날의 장면입니다. 이 그림도 죽은 사람이 아닌,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죽은 소피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면 그녀의 가족의 심리, 상실의 슬픔과 충격에 빠진 가족의 상태가 표정과 행동에서 그대로 들어납니다. (에드바르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3년) 의사로서 딸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기도, 그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의자에 앉아 있는 이모,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는 누이 라우라, 그리고 그 뒤로 고개를 숙인 뭉크, 슬픔을 참지 못해 방을 떠나는 동생을 그렸다고 설명합니다. 뭉크는 소피가 죽던 날, 가족이 겪는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뭉크의 그림 <임종 침상에서>도 이런 가족의 슬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른쪽 끝의 해골에 가깝게 제대로 그리지 않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뜁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도 어색하고 힘든 임종 침상의 아픔을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뭉크, <임종 침상에서>, 1895년) 임종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뭉크는 노르웨이 1,000크로네(DKK) 지폐에 초상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국민적인 화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겪었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그의 그림에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며 인간 실존의 불안, 두려움, 질투, 고독 등을 인물의 얼굴과 움직임에서 표현했습니다.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특징을 보이는 뭉크의 그림은 대부분 평면에 몇 가지 색으로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묘사로 주관적 감정을 강렬하게 들어낸다고 평가됩니다. ‘임종’(臨終)은 사전에서 ‘목숨이 끊어져 죽음에 이름이나 그 때’ 또는 ‘부모가 운명할 때 그 자리를 지키며 모심’으로 정의합니다. 이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는 누군가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임종’은 ‘임종을 지키다’는 표현으로 많이 쓰여 누군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함께 한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의 자리에 함께 하는 것, 임종을 지킨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 때 같이 있느냐 없느냐로 효와 불효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고인을 정말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를 추측하기도 하고요. 아마도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뭉크, <저승에 있는 자화상>, 1895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사별’(死別)이라고 합니다. 특히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헤어짐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그 중에서도 친밀한 관계, 고마움이 많은 가족의 죽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별(bereavement)의 영어 단어에는 ‘빼앗기다’(Shorn off) 또는 ‘완전히 찢어지다’(torn up)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듯 가족과의 사별은 한편에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런 죽음의 영향은 주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마르게까지 합니다. 그런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해 당황스럽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제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엉뚱한 행동이나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와 선택을 보이기도 합니다. 잘 떠나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삶영화 <와일드>(Wild, 미국/2014)는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의 자서전 『와일드』(wild)를 원작으로 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 이후 마약과 외도로 방황하다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된 셰릴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립니다. 셰릴은 엄마의 죽음 이후, 깊은 절망을 경험하며 일상의 삶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을 잇는 4,285km의 도보여행 코스, PCT(the Pacific Crest Trail) 횡단을 결심합니다. 처음 하는 장거리 여행은 배낭을 너무 무겁게 만든 실수부터 시작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94일간의 여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 새로운 용기를 발견하는 중에 인생을 새로 시작할 힘을 얻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셰릴이 숲속에서 뛰쳐나온 짐승 라마를 안심시키며 한 꼬마와 대화할 때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나를 사랑하다면 이리 와서 내 곁에 앉아 보세요. 작별인사를 그렇게 서두르지 마세요. 부디 이 홍하의 계곡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 카우보이도 잊지는 말아 주세요.” 미국 민요 <Red River Valley> 입니다. 여기서 이 노래는 셰릴의 삶의 변화, 이제 사랑하는 엄마를 잘 떠나보내고 그리고 주인공이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마침내 긴 여정을 끝낸 셰릴의 말입니다. “모든 고통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여전히 좌절은 존재하지만 전처럼 무너지지 않고, 힘들지만 결국 이겨낼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괜찮아질 거야’라는 울림이 느껴진다.” - 영화 <와일드>(Wild) 죽음은 언제, 누구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실제 현실입니다. 죽음의 바로 그 순간을 알아낸다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기에 더욱 평소에 사랑과 관심,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나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너무도 중요합니다. 임종의 순간에 바로 그 옆 자리를 지키는 것, 그 이상으로 말이지요.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한 과정이듯, 임종을 지키는 것과 일상의 삶을 함께 하는 것도 하나임을 다시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