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란의 주요 메시지태초부터 알라와 함께 “경전의 모체”로 존재하다 무함마드를 통해 인간에게 완전히 계시되었다고 믿어지는 꾸란은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주제들을 담고 있다.첫째, “알라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창조주이다” (Tawhid, 절대적 유일신론)라는 주제는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부터 꾸란의 일관된 주제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고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의 근간이 되는 신과 사탄, 또는 선과 악의 이원론은 철저히 배제되며 그러한 믿음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로 배척된다. 사실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는 원시적인 다신 숭배에 빠진 아랍민족 보다는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인, 기독교인들에게 더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꾸란에는 이러한 종교인들을 “그 책의 백성들” 이라고 부르며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었다. 그러나 이슬람 공동체의 성장과 더불어 특별히 유대 부족들과의 충돌로 인해 우호적인 관계는 깨어지고 그 이후에 계시된 꾸란의 구절들에서는 이전과 같은 호의적인 표현을 찾기 어렵게 된 것이다.그런데 초기의 꾸란의 구절들을 보면 비록 무함마드가 유일신 신앙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는 하였으나 신학적으로 이슬람 이전의 신앙의 흔적이 남겨진 경향성을 보인다. 즉 초기의 꾸란의 구절들에서 알라는 인간이 마땅히 경배해야 하는 “가장 높은 주님”으로 찬양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고신 외에 다른 신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상정하는 것인데 이러한 구절들은 얼마되지 않아 유일신에 대한 찬양으로 바뀌어 진다. 그 이전에 궁극적이라고 간주되었던 존재들의 속성이 모두 알라의 것으로 바뀌었고 그러한 유일신에 대해 인간은 끊임없이 예배해야함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무슬림들을 부르는 또 다른 명칭으로 "무와히둔(muwahhidun)"이 있는데 이는 "일신론자" 혹은 보다 생동감 있는 의미로는 "신의 유일성을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알라는 초월적이고 인간의 생각과 표현의 한계를 너머서는 존재이므로 "성자와 성부도 두지 않으셨다."(최영길 번역, 꾸란 112, “진수의 장”, 메카 계시)[1]. 따라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같은 것은 용납될 수 없고 더 나아가서는 무슬림들의 신앙적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이슬람에서 용서될 수 없는 죄인 쉬르크(shirk), 즉 알라와 다른 것(피조물)을 관련(associating)시키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두번째로 꾸란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 반복하여 상기시켜주고 있다. 시카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이슬람을 강의했던 파키스탄 출신의 저명한 이슬람학자인 파즐루 라흐만(Fazlur Rahman)은 “꾸란의 기저에 놓여 있는 가장 큰 관심은 인간과 그의 향상이다. 그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결과로 주어지는 위중한 형벌을 직면해야만 한다”(At bottom the center of Qur’an’s interest is man and his betterment... While the potentialities of man is immense, equally immense, therefore are the penalties which man must face as a result of his failure. 필자 역)라고 말함으로써 꾸란의 계시의 성격과 내용을 간명하게 정리하였다.[2]창조주인 알라와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놓인 존재론적 차이는 이슬람 신학의 중심 주제이다. 이슬람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죄인은 아니나 끊임없이 알라의 명령을 잊어버리는 존재이다. 따라서 알라가 수없이 많이 보내준 선지자들을 통해 알라의 명령을 상기하고 피조물임을 인식할 때 사고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교만함과 부, 소유, 유력 부족의 일원임에 대한 자랑 등을 제거할 수 있다. 탐욕, 계량을 속이는 일, 타인의 소유를 횡령하는 일,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언어폭력 등의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 이 모든 행위들은 기록이 되어 악한 행위가 선한 행위를 넘어서는 모든 이들을 알라는 용납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한 고군 분투(struggling)[3]를 통하여 선한 삶을 살아낸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금욕하고 살아야 했던 무슬림들에게 지복의 낙원이 허락된다.“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자는 아래에 냇물이 졸졸 흐르는 낙원으로 들어가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알라의 진실한 약속이다. 알라의 말씀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너희들이 제멋대로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성전의 백성들[4]이 제멋대로 희망한다고 해서 그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나쁜 짓을 행하는 자는 당연히 그 대가를 받게 마련이다. 그리고 알라 이외에 어떠한 자기편이나 구원의 손길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믿음이 깊은 자는 누구든지 낙원에 들어가, 대추씨 만큼의 부당한 취급도 받지 않는다”(4:122-124).꾸란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로서 원죄와 같은 불명예스런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선지자들의 임무도 인간을 이전에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명예로운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래적 운명을 드러내 알려주는 것이다.죄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죄는 신에게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신의 뜻대로 창조되었고 외부의 영향이 없는 한 그는 선하지만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모든 신자들이 이러한 지식을 확고히 갖게 하는 것이 이슬람 신학의 가장 큰 목표인 것이다.세번째 꾸란의 주요 주제는 “구원”이다. 꾸란은 각 개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대지가 심하게 진동하고 대지가 그 짐을 퉁겨내고[5] 어찌된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말할 적에, 그날 대지는 모든 소식을 이야기 하리라. 당신의 주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그 날 사람들은 삼삼오오 나타나서 자기의 행한 일을 나타내 보인다.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선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본다.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악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본다.”(99장, “지진의 장”. 메카 계시)마지막 심판에 대한 꾸란의 가장 대표적인 위의 구절에 나타난 대로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 받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매일 분투(struggle)해야함을 꾸란은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황혼에 걸어서, 사람은 파멸 가운데 있다. 믿고 모든 선을 행하고, 서로 진리를 권하고, 인내를 권장하는 사람 외에는.”(103장) 이 때를 위해 모든 무슬림들은 “내가 정말 모든 것을 바르게 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며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하기 위해 무슬림들의 삶 속에 그 많은 가이드라인과 규칙과 법들이 필요한 것이다.따라서 창조될 때부터 신에게 돌이켜 구원받기로 예정된 인간은 중보자, 대속자가 필요 없다. 꾸란에 계시된 신의 명령에 복종하므로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교적 개혁적인 이슬람 학자로 분류되고 그러한 성향에 의해 미국의 자택 앞에서 무참히 살해된 이스마엘 알 파루키(Ismael Al-Faruqi )도 “이슬람에서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종교적, 윤리적으로 타락했다고 하기 보다는, 인간이 알라의 칼리파, 대리자라고 환호한다. 즉, 인간은 완전한 형태이고,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받았다. 심지어 계시의 은총까지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이슬람의 용어가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팔라(falah), 즉 시간과 공간에서 신의 뜻을 긍정적으로 성취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해방’ 과 ‘구속’에 해당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슬람에서 구원을 말할 때 그것은 무슬림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종교적 의무를 완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무슬림들은 부활의 날에 알라의 심판을 피하고, 용서를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구원관에 근거하여 무슬림들은 알라가 보낸 수 많은 선지자들 중에서 무함마드와 더불어 위대했던 선지자로 존경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정한다. 알라가 보낸 대언자가 인간의 간계한 계략에 의해 살해되는 것은 알라의 전능과 공의를 훼손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이 모든 인류의 대속을 위한 것이라 할 때 그것은 필요가 없었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행한 부적절한 행위에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죄를 유전받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더욱이 나의 죄를 다른 사람이 대신 속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가장 비윤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 신학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당연한 결론을 갖게 된 것이다. 나가는 말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슬람신앙은 세상에 신은 오직 알라만이 존재하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어질 때부터 낙원에 이르도록 운명지어졌다. 그러나 흙으로 빚어진 인간에 비해 빛으로 창조된 천사를 배제하고 피조세계에서 알라의 대리자가 된 인간을 시기하여 타락한 천사, 곧 사탄으로 인해 인간은 일생토록 알라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한 유혹을 이겨내는 “고군분투” 지하드를 통하여 마지막 때에 계량되어 질 저울에서 선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큰 무슬림들은 모두 낙원에 이르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롯이 창조자인 알라의 영역이고 선택이기 때문이다.무슬림들은 자신들의 경전인 꾸란은 위로부터 내려온 계시이고 기독교의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역사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무슬림들을 만날 때 마다 필자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실현할 수 없는 가능성의 무게를 인간의 어깨에 매어주고 수수방관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자체가 창조주의 자리를 내어 준 환대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에도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인간을 위해 결국 십자가위에서 구원의 자리를 내어주는 환대를 실현한 사랑의 하나님이고, 성경은 그러한 사랑이 동기가 된 하나님의 선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이 상황에서 무슬림들은 귀와 입이 없어 인간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 알라의 자비와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며 오늘도 꾸란의 구절을 외우고, 해가 뜨기 전부터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번의 기도를 드린다.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 혼합된 민속종교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정령들을 두려워하며 종교 지도자가 만들어 준 부적과 성분을 알 수 없는 약들을 복용하며 어서 이 재난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무슬림도 수없이 많다.그들은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1%도 않되는 Global Jihadists도 아니고 그저 그 땅에 태어나 대대로 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복음을 알 수 있겠는가. 팬데믹이 한창이던 올 해 3월 온라인으로 모인 이슬람 선교를 위한 네트워크 모임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며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 종족보다 더 심각학 “지속적인 전도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미 접촉 종족수”가 450개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미전도, 미접촉 종족 출신의 무슬림들이 우리 곁에 이웃으로 함께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근거 없는 이야기들에 휘둘려 두려움과 배척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복음을 들려줄 때이다. Oxford Center for Christian-Muslim Relations의 오랜 책임자였던 Ida Glaser의 말과 같이 무슬림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은 언제나 “십자가 사랑의 확증이어야 하며 그것은 언제나 말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철저한 복종을 통한 구원의 예정의 실현”이라는 멍에를 지고 14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고군분투하던 무슬림들에게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길일 것이다.[1] 한국 이슬람 중앙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배포한 꾸란의 번역자인 전 명지대 아랍지역학과의 최영길 교수는 이 부분을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적 언어로 번역하였는데 원뜻은 “알라는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아니했나니“가 맞다.[2]Fazlur Rahman, Islam: Introduction, 2nd edition(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35. [3] 이것은 아랍어로 Jihad로서 오늘날 성전으로 번역되는 그 단어이다. 지하드는 이렇듯 본래 “알라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지하드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무력에 의한 것 만을 지하드로 호도하고, 축소, 왜곡하는 일이 이슬람권, 비이슬람권 모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4] 앞서 언급했던 “그 책의 백성들”, 즉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의미한다.[5] 무덤이 열려 잠자던 자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