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교가 한국그리스도인에게 끼친 영향 유교는 종교인가?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상반된 의견들이 있습니다. 먼저 유교의 주된 관심사가 이 세상이고, 삶과 우주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종교는 아니며, 윤리나 철학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교는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조상들을 숭배하고 제사 의식이 있기 때문에 종교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유교의 제사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뿌리에 대한 확신이나 모색이라고 해석하지만, 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가 삶에 대한 궁극적 의미와 죽음에 대한 극복 방법을 제시함으로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종교적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죽은 자의 혼백을 불러들이는 초혼 때문에 유교의 기원을 무속종교로 보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유교의 기원은 종교적이며, 제사는 종교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줄어들긴 했지만, 설날과 추석 때 보게 되는 귀성, 성묘 인파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조상에게 유교식으로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며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 중요함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파와 영향 조선사회는 개항으로 인하여 전통과 근대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의 수용은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저항을 유발했습니다. 저항의 중심에는 유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기독교의 수용을 세계관과 세계관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양종교인 기독교의 유입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혼돈에 대한 경계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수용된 뒤부터 기독교는 교육·의료·계몽운동·청년운동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며, 반감의 수위를 낮추게 됩니다. 개신교는 천주교가 이미 18세기말부터 조선에 대한 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많은 희생을 치룬 것에 비해 늦은 시기에 조선에 유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전래되었던 시기에 비해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교를 진행할 수 있었고, 국가권력과의 충돌을 피해(정교분리정책) 주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그 기반을 넓혀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성장은 근대 한국종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유교 등 전통종교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모델 삼아 자신의 전통을 혁신하는 개혁운동을 벌이게 되었는가 하면, 근대 한국종교사를 주도한 신흥 종교 가운데 하나인 동학 역시 천도교로 개편되어 ‘개벽’(開闢)과 ‘혁명‘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인가? 유교의 조상제사가 과연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인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있습니다. 가족 가운데 일부만 기독교인일 경우, 조상들의 기일을 앞두고 제사 문제로 인해 집안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가장 갈등을 빚었던 문제가 조상제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되므로 조상제사가 없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를 강조하지만, 죽은 후에 부모에 대한 의례는 없습니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제사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부모에게 효를 표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유교의 전통인 조상제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화적 갈등의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명나라 때 들어왔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1552-1610)는 현지문화적응 방식을 채택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는 중국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중국인들이 가톨릭 교인으로 개종하는데 제사를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했고, 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들어왔던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은 원칙주의의 입장을 취해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금지했습니다. 그 후 교황에 따라 제사를 우상숭배로 볼 것인가, 전통 문화로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이 달라지는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가톨릭교보다 후에 중국에 들어갔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교가 이미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던 것에 영향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제사를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5년의 중국 가톨릭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에 대한 금지사항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중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결정하고 시행했던 제사금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여 시행했습니다. 1891년에 아펜젤러는 제사를 포기해야 한다면 세례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어떤 양반의 경우를 기록하면서 자신은 1890년 상해 선교사 대회의 결정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895년 마펫이 네비우스의 저술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번역한 '위원입교인규됴'가 세례문답서 및 생활안내서로 제작됐습니다. 이 문서의 제1조에서 귀신숭배, 우상숭배, 제사를 금지했고, 제3조에서는 부모님을 살아 생전에 봉양하여 효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감리교도 같은 해 스크랜튼이 매클레이의 저술을 번역한 '세례문답' 제1조에서 마귀와 마귀의 일인 '우상을 섬기는 일'과 '불효'를 거절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당시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제사가 제일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만약 제사를 포기하면 가족공동체에서 추방되고 많은 박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제사금지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를 하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효문화운동을 일으키고 효도신학을 발전시키고 추도예배를 점차로 정착시켜 나갔습니다. 초기 추도예배는 전통 제사의 요소와 기독교적인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일에 모여서 등촉을 밝히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통곡한 것이 전통 제사의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예배의 요소는 기일에 선교사와 교우들을 초청해 기도하고 찬미했고 생존 시의 믿음과 현숙한 모습을 기억했고 다시 기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추도예배의 모습은 우상숭배의 요소는 배제하고 제사의 요소들은 보존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요소를 가미한 특색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고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배제됐습니다. 1904년에 호주 선교사 엥겔은 선교사들이 제사 금지를 비롯해 한국의 여러 관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보다는 한국교인들이 성령의 인도 하에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했습니다. 반면에 마펫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조상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니며, 교인들은 그러한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당시 다수 선교사들의 입장이었습니다. 1911년에는 '그리스도인회보'에 남감리회 목사였던 김흥순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내용의 글을 싣습니다. 그는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조상 제사와 다름없고, 죽은 후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으며, 성경에 없는 법이고, 장례식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산 자를 위해 기도하러 모이는 것이라 지적하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1920년에는 남편이 예수를 믿고 제사를 폐지하자 아내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조상제사를 둘러싸고 또 한 번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토착화 논쟁에서 다시 한 번 이 문제가 다루어졌습니다. 복음과 문화는 구분되어야 하며,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죄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제사에서 종교성을 부정하고 조상에 대한 효도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후에 제사문제에 대한 논의가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조상제사에 대한 세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조상제사를 효행의 실천 차원에서 일상화된 문화적인 요인으로 보고 복음의 토착화의 관점에서 개선하거나 수용하려는 입장으로, 주로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에서 발견됩니다. 두 번째로 금지적 견해는 예수교장로회 고신과 합동측의 입장으로, 제사는 조상을 숭배하는 예배이므로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중도적 입장으로,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개혁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주장은 아직 한국교회에서 수용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대부분 한국교회가 제사를 대신해 추모예식을 거행하도록 하고 있으며, 제사를 지낸다거나 제사상에 절하는 일을 금하고 있고 교인들도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친지의 기일이 되면 비그리스도인 가족들과 함께 모이게 되고, 제사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절을 해야 하는지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조상귀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와 절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사를 금지할 때 제사의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해도, 제사가 가지고 있던 효도, 조상기림, 가족공동체 유지의 미풍양속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핵가족제도와 개인주의화, 세속화, 도시화의 결과로 가족이 붕괴되는 때에 추모예식을 통한 가족공동체 형성과 효성의 보존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모 부양‘에 대한 통계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모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답변이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임을 보여주고 있어, 조상에 대한 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부모에 대한 기독교적인 효사상을 교육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백낙준은 1927년 출판된 <한국 개신교회사>(연세대출판부, 번역판 1973년 출간)에서 "조상숭배는 중국과 일본 선교회들의 관례에 따라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므로 일관되게 금지했다. 조상숭배의 이론, 성격과 숭배 방식의 문제는 간단히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서술했다. 옥성득은 '초기 한국 개신교와 제사 문제'에서, "유일신관과 합리주의 노선에 서 있던 19세기 구미 개신교 선교사들의 전도 문서를 보면,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