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옥” 감상기 ‘지옥’이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새 한국 드라마 이야기다. 얼마 전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차지하더니 어느 순간 지옥이 그 순위를 채어갔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오징어게임은 못 봤어도 신학자로서 지옥은 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발동했다. 게다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박사과정 수업, ‘Sin, Grace, and Church Discipline (죄, 은혜 그리고 교회 치리/권징)’에 약간의 유익이 있지 않겠느냐라는 기대감도 들었다. 사명감과 효용 가능성에 대한 기대, 이 얼마나 절묘한 조합인가! 그리하여 금쪽같은 주말 오후 3시간 이상을 오롯이 투자했다. 그래도 시즌 1은 6부작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판타지(?)와 사회적 비판으로 인간의 종교적 심성과 권력 욕망을 한껏 건드리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지옥 자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옥에 갈 거라는 ‘고지’ 자체가 지옥이고, 죽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 지옥이고, 그리하여 기괴하고 거대한 모습의 동물들에 의해 무참하게 던져져 살이 터지고 피가 뿜어져 나오고, 급기야 그 손에서 발사되는 강력한 불에 의해 거의 완전하게 소멸되어버리는 죽음의 순간이 지옥이다. 웹툰을 보지 못한 채 드라마만 본 사람으로서 이 드라마에선 앞으로도 지옥 자체는 나오지 않고 지옥 같은 경험만이 나오는 것인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드라마에서 죽음은 지옥의 불 같은 특별한 불로 완성된다. 피를 쏟아내는 엄청난 고문(?)이 있지만 순간적이고 강력한 불로 소멸되는 죽음의 순간은 의외로 매우 짧다.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는 지옥 (마3:11-12;막9:42-48; 계21:8)은 없었다. ‘지옥에 간다’는 표현을 그대로 쓰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옥 메시지가 강렬한 것은 지옥에 가는 사람이나 지옥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나 그 죽음이 너무 참혹하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실제 지옥에 가는 것은 영혼일진대, 그 영혼이 경험하게 될 지옥은 도대체 얼마나 더 참혹하고 무서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거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더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고 또 지옥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지옥 고지를 받은 이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하고 시연하면서도 갖은 악과 혹세무민을 서슴지 않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작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지옥 고지와 실현을 인간의 죄악에 대해 더 이상 참지 않으시는 ‘신의 간섭’이라고 해석한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시대와 사못 유사하다. 아니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보다 더 공정해 보이는 신이다. 지금 세상은 노아의 시대보다 더 사악할지도 모르는데도, 이 신의 의도에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근심하시고…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창6:7)라고 천명하셨던 창세기의 하나님과 같은 “신의 의도”는 없다. 즉 이 땅의 사람 전부가 아니라 오직 일부의 사람, 죄인만이 지옥 고지를 받는다. ‘지옥’은 천국의 반대 개념이고 기독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사후세계를 독자적인 고유 영역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중 다수의 종교는 권선징악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원칙을 천국과 지옥에 적용한다. 누가 봐도 악한 사람이 지옥에 가는 셈이다. 물론 짐짓 명확한 듯 보이는 선악의 기준도 정작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어느 정도의 선과 어느 정도의 악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사제의 역할이 부각되기도 한다. 무교에서 무당이 영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Christianity)는 천국과 지옥에 가는 사람이 정해지는 기준은 단순히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천주교, 정교, 개신교는 각각 조금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1)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해진 인간 대속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단순히 착하게 살았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다. 마찬가지로 믿지 않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다. 적어도 개신교에서 이것은 더욱 분명하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종말의 심판으로 완성된다. 인간 타락으로 개인의 종말이 오고 세상의 종말이 예고되었다. 세상의 구원자(Salvator mundi)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통치자요 심판자(Christ Pantocrator) 이시다. 시작이 있는가 하면 종말이 있다. 창조가 있는가 하면 심판이 있고 그리스도는 사람을 심판하신다. 그러나 심판으로 끝나는 종말은 역사의 마감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여는 출발점이 된다.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는 혹 강한 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은 심히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 낭떠러지가 한없이 깊은데 그의 발은 이미 그 낭떠러지로 미끄러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 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내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 73: 11-13;16-19) 2. 기독교 역사에서 죽음을 읽다.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는 삶을 읽는다. 개인의 삶, 교회의 삶, 시대별로 달라지는 삶, 삶의 연속적 비연속적 요소들, 그러나 삶의 역사의 다른 말은 죽음의 역사일지 모른다. 그리스도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하셨다. 기독교 역사는 죽음과 부활의 역사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 그를 믿는 자들도 죽었으나 살았고, 그의 교회는 핍박으로 없어진 듯했으나 다시 부활하는 생명의 종교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1)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시작된 기독교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인간의 몸을 빌어 가장 연약하고 무기력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가르쳐 바울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기꺼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인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높은 벽을 쌓아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에 그 벽을 부수러 오셨다. 흑암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최고의 지성을 가지고도 차마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지혜’로 오셨다. 창조자인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를 피하려고 숨은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를 살리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이 되심(성육신 사건)으로 온 세계의 구원이 되었다. BC 4년경 로마제국의 속지인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는 어린아이로 태어나셨다. 어린 아기에서 30세의 청년이 되기까지 그는 사람들 중에 사셨다. 부모와 형제자매, 또 이웃과 함께 30년의 세월을 사시면서 이 땅의 죄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경험하셨고, 때가 되매 그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마침내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의 고통을 받아들이셨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값을 단번에 치르셨고, 죽음을 정복한 그의 부활은 인간을 살릴 뿐만 아니라, 창조자요 구원자인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새 삶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사 9: 6)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그의 죽음을 통한 구원과 부활을 통한 새 삶을 믿는 자들이다.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 중 다수는 그들이 그리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했고 빌라도에게 그를 죽이라고 소리친 어리석은 ‘무리’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의 자손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계를 품는 종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온 세계가 선포하고, 하나님이 그 세상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하셨음을 선포하는 일에 그들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 3:5)2)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교회 공동체 기독교 역사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이들과 그들의 교회 공동체이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보이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끌어 가나 사람이 주인이 아닌 특별한 공동체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표현으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도행전 기록에 의하면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한곳에 모여 약속하신 것, 즉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제자들의 공동체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계기로 교회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도망했던 자들이었으나 부활로 감추어진 비밀에 눈을 뜬 제자들은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대로 거듭난다. 그들은 성령의 약속은 우리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들 즉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믿었다. 그들의 교회는 ‘말씀의 가르침과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는 공동체였다. 핍박자였던 바울이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함께 했을 때 그들은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실공히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것이다(고후 5:18-20). 그래서 그래서 그들을 보내신 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 가 되었다. 하나님과 일하는 자가 되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리라만은, 세상에서 일하니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공동체의 파송을 받고 보고하며 협력을 도모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의 교회이다. 하나님을 믿으나 조직교회와 일하는 역사가 이 땅의 교회의 역사이다. 교회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려고(고후 10:5)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후 1:23-24)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역사를 바꾸다. 2000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온 세계에 알렸다. 불순종의 죄를 택한 인간을 구하려고 죽음을 선택한 신, 그는 죽었으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고,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종족, 모든 신분의 사람들을 위대한 신의 자녀로 초청하셨다. 이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고귀한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며 떡을 떼고 서로를 돌본다. 기독교가 출발한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은 다수의 민족과 인종이 여러 층의 신분사회에서 공존하고 있었던 고대 사회였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권력이 아니라 봉사를, 군림이 아니라 사랑을,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주창한 새로운 종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핍박도 이겼고 전염병도 이겼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진정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요, 부활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요한복음 16:33) 1) 가톨릭과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에 의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할 수 있는데 그것을 행할 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