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에피소드: 로마제국의 기독교 (1) 1. “세계의 수도”1)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이태리는 변했지만 로마는 그대로다”라고 했다. 로마 곳곳의 유적지와 유적들이 언제나 그 옛날 로마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가, 르네상스의 시인 페트라르카는 “로마를 방문하지 않고 다른 도시를 흠모하는 사람은 바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 뿐인가! 19세기 독일의 시인 괴테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수도’라고 불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격언과 그리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세계인에게는 로마에 대한 굉장한 존경과 로망이 존재한다. 이런 로마를 만들어 낸 것은 로마제국이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기독교역사를 형성하는 가장 직접적 배경이 된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기원전 63년 9월 23일~서기 14년 8월 19일) 초기 기독교의 정치 경제 사회의 배경이 되는 BD 330년부터 AD 330년이다. 이 시기는 알렉산더 대제로부터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대제에 이르는 때이다. AD 330년에 로마제국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했고,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지금의 터어키)족에 의해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이 멸망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330년이라 함은 통합로마제국의 전성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정점에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대제가 있다. 그럼 왜 알렉산더 대제로부터 시작하는가? 그는 그리스제국의 황제이다. 그런데 그의 통치가 만들어낸 엄청난 영토 확장과 민족 통합, 그리고 각종 문화유산이 로마제국으로 이어져 제국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그레코-로마 (Greco-Roman/Hellenistic Roman World) 시대이다. 로마제국은 유럽, 소아시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엄청난 정치경제 권력이었다. 로마공화정이 로마제국으로 거듭난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을 BC. 31년에 악티움(이오니아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약 4년 후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 BC27- AD 14)의 칭호를 얻어 황제가 된다. 이 후로 이 칭호는 황제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된다. 누가복음 2:1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에서 ‘아구스도’가 바로 이 아우구스투스이다. 이후 ‘5현제’의 시대를 거치며 로마제국은 정치 사회적 안정과 영광의 기틀이 확고히 했고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이르면 제국의 영토가 최고치에 다다르게 된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22:17-22) 2. “때가 차매”예수의 탄생을 설명하는 갈라디아서 4:4은 “때가 차매”라는 서사적 문구로 시작한다. 이 문구는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최적조건을 갖춘 당시 로마제국의 상황을 말한다고 이해되었다. 성육신을 작정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때가 찼다는 것이다. 이 때는 로마제국의 정복으로 이루어진 도로 확장, 언어와 문화의 통일 등으로 교류와 소통이 편리해진 때였다. 그런데 이런 결과적 상황을 로마제국의 성과라 하긴 어렵다. 이 시기는 로마제국의 초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헬라시대의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그레코-로마시대라고 한다. 기독교역사학자 에버렛 퍼거슨(Everett Ferguson)은 알렉산더 대제를 통해 마련된 그리스제국의 영향력을 10가지로 정리했는데, 이 중 많은 것이 갈라디아서 4장 4절의 “때”, 하나님의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에 적절했던 때의 조건과 동일하다. 구체적으로 보면 헬라인들의 활발한 이주, 헬라문화의 빠른 전파, 통일 화폐를 통한 경제 부흥, 헬라어와 헬라사상의 보급확대, 교육수준의 향상, 삶의 방식을 대표하는 철학의 등장, 도시 중심의 생활, 개인주의의 증가 등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기독교전파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게 되는지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잘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헬라 철학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기독교 전파에 도움이 되었는지를 보자. 사도행전 17장에 ‘아레오바고(Areopagus)의 연설’이 나온다. 이 연설은 헬라사람들의 철학적 삶과 종교적 심성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만약 아테네 사람들이 철학적인 사고와 토론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바울의 변증에 설복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오늘 우리는 변증학이 필요한 지성사회와 현대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독교선교의 좋은 본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겼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도행전 17:28-31)"Cicero Accuses Catiline" Cesare Maccari in 1888그리스도의 탄생은 오랫동안 세계 역사를 구분짓는 절대 기준점이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BC (Before Christ)와 AD (Anno Domini)가 그것이다. 학자들이 아니라면 알기 어렵겠지만, 이 당연시되어지던 구분법도 세태의 영향을 받고 있다. 탈종교화를 강하게 추진하는 서양학자들은 더 이상 이 구분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BCE (Before Common Era)와 CE(Common Era)를 대신 사용한다.2) 이 글에서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BC와 AD의 구분을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헬라시대를 이은 로마제국의 한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태어났다. 구체적으로 황제 아우구스투스(이 말은 그 자체로 황제이기도 하다) 때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유대인 분봉왕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때가 BC 4년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정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왕(왕정), 원로원(대표제)와 헬라시대의 에클레시아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병합하고 있는 독특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르다’라는 헬라어에 기초하고 있고 교회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에클레시아(ecclesia)’는 직접 민주주의의 방식이었는데, 로마제국이 이를 사용하기에는 이미 너무 거대 제국이 되었다. 게다가 황제의 독재가 운운되던 시대에 더 이상 사용되긴 어려웠다. 원로원은 대표적인 간접민주주의의 방법이지만 소수의 권력층만이 대표가 될 수 있는 불균형과 불평등의 요소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로마제국은 다양한 정복지를 다스리던 분봉왕을 비롯하여 광할한 제국을 3등분 혹은 4등분하여 왕과 황제로 나누어 통치하는 과두정치(Oligarchy, 소수의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치체제)의 형태도 사용하고 있었다. 기독교초기 역사를 읽을 때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유대 지역을 관할하던 총독은 빌라도였는데 로마인인 그는 유대인들인 분봉왕들의 협조를 얻어 효율적이고 안정된 유대인 지배를 시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 사건에서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사이가 언제나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빌라도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고소로 끌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독대한 사람이고 그의 무죄를 알고서 손을 씻는 어설픈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집행관의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로마제국의 사회경제는 정치와 법, 군대에 의해 정의되었다. 로마의 군대는 로마화(Romanization)의 선봉장이요, 정치사회적 안정의 상징이었고 경제적 부요를 보장하였다. 성경에서 ‘군대’ 관련자가 여러 차례 등장하고, 군대라는 용어가 긍정적으로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이 로마군대의 위상은 물론 어느 정도의 신뢰까지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회계층적으로 귀족과 평민, 노예가 있었던 신분사회였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던 상전과 종의 관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었으나 기독교의 등장은 기존의 신분체계 자체보다는 관계 맺음에 큰 도전을 주었다.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다양한 조언들이 아내에게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자녀에게만 아니라 부보에게도, 종에게만이 아니라 상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종의 신분에서 사역자가 된 사람(오네시모)이 받게 되는 존경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에서도 여성에게 법적 권리는 없었다. 교육의 기회나 사회적 자리는 매우 제한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기독교만이 천하 모든 민족의 남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로마제국의 유화정책은 그리스제국에서 혹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페르시아제국에서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에 관한 한 동일성과 통일을, 문화와 관습에 관한 한 다양성을 허용했던 유화정책은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의미했다. 유대인들의 종교 유대교는 성전과 예배(제사), 경전 연구와 실천,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과 대제사장으로 대변된다. 학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사장들과 가까이 있었다. 또 다른 유대인 집단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꿈꾸던 열심당들이 있었고, 그 대척점에 세상을 떠나 종말론적 기대 속에 금욕을 실천하던 쿰란공동체가 있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다양한 그룹의 정치역학을 배경으로 씌여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 중에 오셔서 유대인들의 메시야 신앙 외에는 그 어떤 기대에도 부응하지 않으셨다. 율법 아래 태어나신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의 근간이 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하셨다. 산상수훈에 나타난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37)에서 보여주듯 그는 율법의 형식이 아닌 율법의 참 정신으로 파고 들었는데, 그 정신은 다름아닌 하나님 사랑이요 이웃 사랑임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아끼는 삶, 그 새로운 삶으로 유대인들을 초청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8-9) 1)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1786년 그의 오랜 숙원이었던 이태리 기행, 특히 로마 방문을 실행에 옮긴다. 11월 1일 로마에 도착한 “드디어 나는 세계의 수도에 도착하였다. 만약 내가 훌륭한 동행자와 함께, 아주 견식 있는 사람의 안내를 받으면서 십오년 전에 이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으면 나를 행운아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안내자도 없이 혼자 방문해야만 할 운명이었다. 그 기쁨이 이렇게 늦게서야 베풀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 내 청년기의 모든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본다… 오직 로마에서만 로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Italian Journey 『이탈리아 기행 1-II』, 민음사 (2010)에서 이렇게 말했다.2) 기독교학자들은 BCE와 CE를 사용하면서도 그 내용을 새롭게 사용한다. 즉 BCE는 ‘Before Christian Era’로, CE는 ‘Christian Era’ 로 정의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