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천국이 왜 중요한가?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인생과 세상에 시작과 끝이 있음을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다시 오실 때까지 신앙은 종말의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의 지고한 경지가 천국과 영생에 이르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기독교가 너무 내세 위주의 신앙만을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며 천국, 하나님 나라, 영생과 같은 기독교 신앙의 종착지를 가리키는 단어들을 순화시키고, 현세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여기는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약화되는 천국의 미래성 물론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신앙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그의 말씀과 뜻을 따르며 기쁨을 누리는 것인데 반해, 내세주의적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세계에 몰두하게 함으로 자칫 현재 우리가 마땅히 보여주고 누려야 할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사후에 가는 장소만이 아니라 현재 경험하는 실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비록 완성된 실체는 아닐지언정, 천국을 미라 맛보고 갈망하며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해야만, 우리의 소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벧전3:15). 천국의 현재성은 다시금 강조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하지만, 천국의 미래성과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그 또한 현세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최근 종말에 관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대담을 들은 바 있습니다. 대담에서 한 패널은 한국교회는 그 동안 너무 내세 신앙만을 강조했다면서 이제는 현세적 천국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그 주장에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동안 내세주의 신앙에 너무 치우쳤던 것일까요?’ 과거 한국교회의 전설적인 전도사 최권능 목사님의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메시지나, 80-90년대 한국교회에 널리 유행했던 곧 세기말에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떠올리면 마치 그랬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참화와 보릿고개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수많은 죽음을 매우 가까이서 목격했기에 내세주의적 신앙은 그 자체로 엄혹한 현실을 넘어서는 희망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내세주의였을까? 하지만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풍토를 회고할 때, 저는 내세주의 신앙이 한국 기독교의 지배적인 문화는 아니었다고 판단합니다. 내세주의 신앙은 논리상 자연스럽게 현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일반적 신앙이 과연 현세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는데 초연했을까요? 이 점에서 한국 사상과 문화를 전공하는 탁석산 선생의 분석은 폐부를 찌릅니다. 그는 한국인의 고유한 문화적 특징 중에 하나를 ‘현세구복주의’라고 명명합니다. 한국인은 내세나 초월성에 대한 신념이 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1) 이렇게 말하면 몇몇 분들은 의아해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간에 그토록 넘쳐나는 귀신 이야기들은 뭔가?’ 하지만 한때 가장 인기를 끌었던 전설의 고향과 같은 TV프로를 자세히 보면 공통적인 스토리 라인이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사후의 귀신이나 저승세계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그 교훈은 철저히 현세적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단골이 되는 주제는 ‘한을 품은 귀신’ 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보면 억울하고 원통한 사연을 지닌 귀신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무섭게 하지만, 결국 그 억울함을 풀어주면 귀신의 소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내세의 이야기가 또 다른 거대한 세계관과 담론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탁석산은 우리와 굉장히 유사한 현세 구복주의 문화를 지닌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을 지나치듯 읽어보면 내세에 대한 묘사가 충분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에녹이나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고, 사울이 무당을 통해 죽은 사무엘의 혼령을 부르는 (그래서 신빙성에 논란이 있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신약성경에 비해서 사후의 천국에 대한 강조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그리던 메시야 대망과 종말사상은 철저하게 현실에서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주위의 나라들이 모두 패퇴하고 예루살렘이 열방의 중심이 되는 그 날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현세주의적 문화는 한국인들의 현세 구복주의 문화와 깊은 공명을 이룬다고 탁석산은 주장합니다.2) 그래서 한국인들이 외국 이민생활에서도 유대인들과 비슷하게 밤낮없이 일해서 비즈니스를 번창시키는 특징을 지닌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유대교의 연속선상에 있는 기독교가 유독 한국에서 성행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공통점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미래의 천국이 현재의 삶을 변화시킨다! 만일 미래의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고하게 갖춰져 있다면 나타나야 할 중요한 특징은 기부문화일 것입니다. 실제로 서구 기독교는 현세와 내세에 대한 이원론의 체계를 오랫동안 견지해왔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기도 합니다. 현세는 유한하며 소멸될 것이고, 더욱 본질적인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이러한 초월적 이원론은 서구 기독교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종종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는 천국의 현재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 이원론을 배격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지만,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원론은 순기능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순수하고 강렬한 소망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로 하여금 현세에서의 번영과 욕망을 다스릴 수 있게 합니다. 서구의 교회들은 지속적인 쇠퇴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교회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상당부분 교인들의 유언에 의한 기부금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기부문화가 서구기독교에 비해 빈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현세구복주의의 성행과 건강한 초월적 신앙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C. S, 루이스의 소설 『새벽출정호의 항해』에서는 (예수님을 비유하는) 사자 아슬란이 페벤시의 아이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그래서 너희를 나니아로 데려온 거다. 여기서 나를 조금 알면 그곳에서는 나를 더 많이 알게 될 테니까.” 3) 나니아가 아슬란이 통치하는 영적 세계라면 ‘그곳’은 현실을 말합니다. 미래의 천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서 성도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살게 할 것입니다. 1 )탁석산,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서울: 창비사, 2008), 55.2) Ibid., 50ff.3) C. 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서울: 시공주니어, 2005). 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