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와 천국의 언어들 한 캄보디아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이 양육한 캄보디아 현지의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교회에 잘 나오고 꽤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캄보디아에서도 한국 문화가 인기가 높은지라, 이 젊은이도 한국에서 제작된 불교의 내세관을 다룬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젊은이가 영화를 보고는 울며 뉘우치고 원래의 가족 종교인 불교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배교하는 어처구이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적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각성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불교의 저승 이 청년이 본 영화 ‘신과 함께’는 1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여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른 대 히트작이었습니다. 영화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소방관이 저승에서 49일 동안 일곱 단계의 재판 과정을 거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갑니다. 망자는 피고가 되어 재판의 각 단계에서 검증을 받습니다.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각 죄에 해당되는 지옥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첫째 재판은 살인 혐의를 판단합니다. 살인죄에 연루되지 않았는지 판단합니다. 둘째는 나태의 죄를 가리는 법정인데 이승에서 열심히 살았는지 판단합니다. 이런 식으로 셋째는 거짓에 대한 재판, 넷째는 불의, 다섯째는 배신 지옥, 여섯째는 폭력, 일곱째는 천륜의 혐의들을 각각 철저히 조사하는 방식입니다. 코믹스러운 영화이긴 하지만 불교에서 가리키는 내세에 대한 이미지와 교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집착입니다. 사후 심판을 거행하는 저승에는 이승의 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저승에서도 망자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하며, 재판을 주관하는 왕들도 망자의 깊은 사정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슬람의 천국 영화에서 드러난 불교의 내세관이 저승의 엄격한 재판을 어떻게 벗어나느냐에 맞춰져 있다면, 이슬람의 내세관은 천국에서 누리는 호사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종 발생하는 과격한 이슬람 단체들의 자살폭탄이나 텔러와 같은 비극적 악행의 배후에는 그들의 기울어진 천국관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꾸란은 무려 1/4이나 되는 분량을 사후 세계에 대한 언급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꾸란도 정직하지 못한 자나 배교자들에게는 가혹한 지옥을 경고하지만, 이슬람 교리에 신실한 자들에게는 환상적인 천국을 제시합니다. 꾸란 37:43-49를 보면 천국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성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가장 축복받은 천국에서 옥좌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흐르는 샘물에서 잔으로 순배를 들게 되나니 그것은 수정같이 하얗고 마시는 이들에게 맛이 있더라. 그것은 머리가 아프지 아니 하고 취하지도 않더라. 그들 주위에는 순결한 여성 들이 있나니 그녀의 눈은 잘 보호 되었고 눈은 크고 아름다우매 마치 잘 보호받은 달걀과 같더라.”1) 꾸란의 천국묘사는 상당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천국에는 물의 강, 우유의 강, 술의 강, 꿀의 강 등이 있으며, 과일 송이들이 손에 닿을 수 있도록 아주 낮게 달려 있고, 천 국에서의 인간은 질병이나 상처 없이 완전하게 젊은 신체를 지닌다고 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현세와는 분리된 천국, 아직 오지 않은 영생의 삶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의 천국이 미래 뿐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현재적 차원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의 언어들 그렇다면 기독교 전통에서는 천국을 묘사하는 어떠한 언어들이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우리는 천국을 가리키는 다양하고 풍성한 언어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단 천국과 하늘나라를 동일한 언어로 간주해도, 그 외에 하나님 나라, 영생, 천당, 천성, 본향, 낙원 등의 단어들을 통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초월적 삶의 실재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주재권이 완벽하게 나타나는 천국을 미래의 영역으로 넘기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끌고 오는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신약학자 폴라 구더(Paula Guder)는 하늘과 땅의 소통은 신약성경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맥락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우리의 현실 세계와 분리된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일과 중요하게 관련을 맺고 때로는 주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변화되심, 부활, 승천, 스데반의 죽기 전 그리스도 목격, 바울의 다메섹 회심, 베드로의 보자기 환상, 바울의 삼층천 경험 등이 대표적입니다.2) 그래서 톰 라이트라는 신약학자는 신약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리이다”라는 기도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은 요한복음 1장 51절에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를 통해서 천국은 땅과 조우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미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천국과 하늘나라보다 더욱 적극적 의미를 담은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같은 단어긴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는 신앙적 언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과 우주에 속한 지구의 모든 영역을 포함시킵니다.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우리에게 현재 하나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 살도록 도전을 줍니다. 따라서 이는 기독교 신앙이 공공영역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해야 한다는 변혁적 제자도와도 연결됩니다. 한때 최권능목사님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로 우리에게 익숙한 천당이라는 단어도 되새겨볼만 합니다. 합니다. 하늘의 집을 가리키는 ‘천당’(天堂)은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거처에 상응하는 심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3)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정확한 표현은 “내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단, 천당은 하늘에 있는 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천국에 비해서 죽어서 가는 장소라는 이미지를 더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은 많이 잊히긴 했지만 ‘천성’(天城)이라는 목적지향적 어감의 단어도 있습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라는 찬송을 부르며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의 믿음을 다졌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잘 담은 단어를 꼽자면 저는 ‘본향’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도 ‘본향’을 찾으며 사모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회개하는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이라는 표현은 복음서 중 누가복음(24:23)에서만 나오지만, 바울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4절에서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경험을 낙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개념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2장 7절은 교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함으로서 이 낙원이 에덴동산의 회복으로서 낙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4) 즉, 낙원은 성도들이 죽음 이후에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일시적으로 안식하는 아버지의 품이면서, 완전한 부활의 서막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는 천국을 가리키는 풍성한 언어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인내와 소망으로 살아가게 하는 귀한 자산들입니다. 1) http://www.tanjaoui.ma/quran/mobile/translate.php?l=122) 폴라 구더, 『마침내 드러난 하늘나라』 (서울: 학영사, 2021), 162-163.3) 천당은 정토를 가리키는 불교적 용어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학적 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허호익, “천당,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한국기독교신학논총」 (41), 361.4) Ibid., 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