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삶: 몸의 부활, 우리의 소망 기독교 역사에서 초대교회는 가장 성경적 모범에 가까운 교회로 평가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곤 합니다. 어떻게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의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순교를 불사하며 신앙을 유지하고 결국에는 제국을 정복하는 경이로운 역사를 일으켰는지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핵심 기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초기 기독교가 하나님나라 운동이자, 부활운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역사의 유일하신 통치자로서 곧 그의 뜻과 정의를 이 땅에 이루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나라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천국을 내세의 초월적 세계로만 보게 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공적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각성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나라 운동은 단순히 인간의 정의로운 결심과 행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운동은 부활소망은 우리의 의식과 삶을 오롯이 지배할 때 가능합니다. 부활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핵심 동력입니다. 부활의 중심성 근래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톰 라이트(N. T. Wright)는 종말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죽은 뒤에 멀리 우주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라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육신도 부활한다는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이 부활하고 불멸한다는 믿음은 고대 그리스의 이원론으로서 신약의 가르침과 무관하다고 합니다.1) 성경은 우리의 육신이 죽은 뒤에 영혼만 불사하여 지속하는 수준의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죽은 다음에 낙원에서 아버지의 품 안에 안식하는 것으로 끝나는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그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 우리의 육신도 온전히 부활하는 소망이 기독교의 진정한 종말론적 태도입니다. 그래서 명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의 삶, 그 이후의 삶’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2) 초기 기독교가 육신의 온전한 부활을 믿고 소망했다는 것은 오늘의 현실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의식을 새롭게 각성시켜줄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최종 종착지이고 궁극적 소망이라면 그 부활에 관해서 우리는 무엇을 더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육신의 부활을 강력하게 증언하지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떠한 육신으로 부활하는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가르쳐주진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뱅은 부활의 방식에 대해서 너무 정교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를 경계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독창적인 신비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기독교강요』 3권 25장 8절).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몇몇 증언을 통해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육신 육신의 부활이 성경적 종말론의 중심 사상이라고 했지만, 언뜻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썩어 없어질 육체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그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말하며, 두 가지 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대조적인 용법은 그의 다른 편지에도 나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고 말하며, 또한 그 다음 장에서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무너지지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의 처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5:1). 그렇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두 가지의 육신을 가졌다는 의미일까요? 폴라 구더(Paula Guder)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맥락(고전15:35-48)에서 바울이 두 쌍의 단어들을 배치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한 쌍은 ‘썩고’와 ‘썩지 않고’라는 쌍입니다. 앞서 42절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시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말하고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을 대조시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또 다른 쌍으로 물리적인 몸과 영적인 몸, 즉, 소마와 프뉴마티코스를 나란히 제시합니다.3) 이러한 짝을 이룸을 통해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부활 이전의 몸은 이 세상의 지배를 받는 데 반해, 부활 이후의 몸은 다가올 시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구더는 주장합니다.4) 다시 말해서, 두 가지의 육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지배하는 시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몸을 입고 온전히 존속할 것이며, 따라서 몸의 부활은 우리 존재의 최종적 결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 연속과 단절 두 가지 다른 육신이 아니라, 하나의 육신이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새로운 지배 아래서 그와 연합하여 새롭게 갱신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다고 할 때, 어떠한 종류의 몸을 가지게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기록에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후 현현 기록들을 보면, 목격자들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한 동안 동행을 하면서도 그 낯선 길벗이 예수님인줄 몰랐습니다. 무덤을 찾은 마리아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동산 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예수께서 해변에 계실 때 배에 있던 제자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바는 우리의 부활하는 몸은 현재의 몸과는 어느 정도 불연속성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예수님과 떡을 나누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연속성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신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에서 부활하셨지만, 도마에게 만져보라고 하신 것처럼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못자국과 창자국은 그대로 있었습니다(요20:25). 그분은 친히 말씀하기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고 하시며 자신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육신의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 하지만 현세에서 부족하고 결함 있는 육신이 아니라 온전하게 치유되고 완성된 육신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시고 설계하신 온전하고 아름다운 하늘의 육신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부활의 목회』라는 책에서 몸의 부활에 관한 설교를 들은 한 장애를 지닌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의 “제가 부활하면 지금 이 몸을 그대로 가져가나요?”라는 질문에 이 신학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녀의 현재 육신과 부활한 육신 사이의 연속성은 좋은 소식으로 들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현재의 육신 안에서 인격적인 존재로 있다. 현재는 고통스러운 불구의 몸이지만, 그 몸을 안고 있는 그녀에게 소망은 존재한다. 기독교적 소망은 부활의 몸이 우리의 현재 육신과의 연속성 뿐 아니라 불연속성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젊은 여인의 소망은 새로워지는 몸이다. 그녀 자신의 몸이지만 온전해지는 몸이다.5)1)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서울: IVP, 2009), 712) Ibid., 2373) 폴라 구더, 2304) Ibid., 2315) 앤드류 퍼브스, 『부활의 목회』 (성남: 새세대, 2013),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