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이란 무엇인가? 천국의 상상력으로 현재를 살기 영원히 사는 것. 영생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영생은 불멸하는 삶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이상적으로 꿈꾸는 단계일 것입니다. 역사상 절대 권력자들은 영생을 희구했고, 고대 신화들에는 불로초를 찾으러 떠나는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존재가 계속해서 무한대로 이어진다는 영생에 대한 갈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것입니다. T. S. 엘리엇(Elliot)에 의하면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이 곧 끝이 아닐까 봐 그에 우리는 두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1) 성경이 말하는 영생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 무한한 삶으로서 영생을 산다면 정말 좋을까요? 우리 자신은 아직 생이 다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생의 마감을 목격한 터라, 끝없이 이어지는 삶이라는 개념도 쉽게 상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생이 얼마나 좋은지, 왜 좋은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한편으로 지옥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끝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 조차하기 싫은 공포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우리가 영원한 상태로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개념 자체를 사실상 무시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생이 정말로 좋은 것이 되려면 우리는 영생의 질적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무한히 산다는 산술적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삶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우리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구약성경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 안에는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새겨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항상 영생을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전도서 3장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영원한 것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하나님께 속했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과 병행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영원한 삶을 별도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욱 명확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중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구절은 성경이 말하는 영생에 관한 가장 명확한 정의일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성부, 성자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아는 것”이라는 말은 인지적 지식이 아니라 깊고 친밀한 관계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간접적이거나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이는 성부, 성자와 교제하며 소통하고 동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지식입니다. 영생의 현재 실습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영생은 우리가 사후에나 경험할 미지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생에 대해서 상상불가의 영역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와 연합되는 삶을 누리는 성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에 들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 존 오트버그(John Ortberg)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어서나 경험할 수 있는 머나먼 외계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며, 단순히 다리를 건너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옳은 교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앞서 말한 유의 영원한 삶이 ‘지금’ 가능하다는 선포다. 은혜로 그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너머까지 말 그대로 영원히 그 삶을 살 수 있다.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추구하고 즐거워한다면 바로 그 순간 영생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죽은 뒤에 천국에 가서야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영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3) 영생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경험하고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영생의 질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 삼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즐거워 할 때 영생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비로소 느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모른다면, 그래서 사실상 하나님 몰래(이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지만) 우리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더욱 달콤하다고 느낀다면 우리에게 미래의 영생은 결코 행복한 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을 무한정 살아가는 영생이 무슨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국 성공회의 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이 남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천국은 그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다.”4) 영생이 우리가 진정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선물이 되려면 지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죄악된 욕망에 이끌리며 사는 것을 더 즐기는 한 우리는 영생의 선물을 누릴 준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내 욕망을 조절하고 순종하는 삶이 더욱 즐겁다는 이 진리를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으신 하나님의 설계에 충실한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을 현재로 데려오다 중세 유럽의 교회들은 고딕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습니다. 고딕 양식은 하늘을 찌를 듯 한 높은 첨탑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같은 곳이 대표적인 첨탑 양식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전후해서 로마 가톨릭의 교회 건축양식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크 양식의 도입입니다. 바로크 양식은 교회당을 하늘을 상징하는 둥그런 돔 형식의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 안을 성스러운 그림과 조각으로 채웠습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마치 천국을 높이 바라보던 신앙에서 그 천국을 교회 안으로 가져오는 신앙의 변화로 보이기도 합니다. 비록 로마 가톨릭 성당 양식의 변화이긴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후, 혹은 머나먼 미래에 영생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한 영생의 삶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미래 뿐 아니라 현재적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마지막 대목은 오늘을 위한 신앙이며 결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1) 팀 켈러, 『죽음에 관하여』(서울: 두란노, 2020), 13/44(전자책버전).2) 존 오트버그, 『인생, 영생이 되다』 (서울:두란노, 2019), 7/76(전자책버전).3) Ibid., 7/76.4) Ibid., 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