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해 전에 뉴욕의 맨해튼에 위치한 카네기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음악전용극장은 유명한 재벌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 11. 25 - 1919. 8. 11)가 신혼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월터 담로시라는 지휘자와 친해지고 담로시가 뉴욕에 공연장을 짓고 싶다고 얘기하자 200만 달러를 내놓아 1891년 5월 5일에 개관축하공연을 한 건물이다. 이후 카네기 홀은 뉴욕 시에 인수되어 운영되었는데, 한 때 헐릴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Isaac Stern) 등 많은 뉴욕시민들의 노력으로 1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세계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아름다운 음악당에 붙여진 카네기라는 인물의 기부인생에 대해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던펌린(Dunfermline)에서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1848년에 가족과 미국으로 이주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슬럼가에 정착했다. 미국에 온 카네기의 아버지는 식탁보를 만들어 집집마다 팔러 다녔고 어머니는 빨래 세탁과 신발 수선을 하며 하루에 16~18시간이나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카네기도 13세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며, 18세에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 시작했다.카네기는 28세 때인 1863년에 키스톤 교량 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해 철강 분야에 처음으로 뛰어든 뒤, 제철소와 용광로회사를 연이어 설립하며 사업의 폭을 넓혀갔으며, 1875년에 미국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강철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석탄, 철광석, 광석 운반용 철도, 선박 등을 수직계열화하는 철강 트러스트를 구축하여 경제계의 거물이 되었다. 카네기는 '철강왕'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이윤추구를 위해 때로는 비도덕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냉혹한 자본가였다. 카네기는 사회진화론의 이념인 경제적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자본의 집중도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한 자본가 정신과 과학적 기업경영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그런데 카네기홀이 준공된 이듬해인 1892년에 카네기의 노조 불인정 정책과 임금 삭감 때문에 홈스테드 제철소 파업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143일간이나 지속되다가 수습되었지만 카네기의 명성엔 큰 오점을 남겼다. 도서관이나 다른 기관들에 보낸 카네기의 선물은 전부 노동자들의 피와 땀에서 착취한 것으로 그는 자선가인 척하는 악덕 자본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카네기는 부(富)를 공익에 돌릴 줄 아는 인간적 자본가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부는 공공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네기의 자선은 도서관을 기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네기는 일생 가운데 정규교육을 받은 시기가 고작 4년에 불과했지만, 도서관의 책으로 독학을 한 그는 여생을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카네기가 기부한 공공도서관만도 3천개에 달했고,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관심이 깊어 7천 대가 넘는 파이프 오르간을 교회에 기증했다. 카네기멜런대학의 전신인 카네기 과학연구원과 기술원을 설립했으며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 단과대학을 지어 사회에 기증하는 등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90%가량에 이르는 3억6500만 달러를 사회에 환원했다. 그는 은퇴 후의 삶을 통해 냉혹한 자본가의 이미지보다는 넉넉한 기부자로 우리에게 더 각인되어 있다. 카네기가 65세에 출간한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이라는 책에서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것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자선 재단 중 하나인 애틀랜틱 필랜트로피(Atlantic Philanthropies)의 창립 회장인 찰스 척 피니(Charles F. Chuck Feeney:1931~ )이다. 척 피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서 뉴저지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경건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세계적 면세점 그룹 ‘DFS’(Duty Free Shoppers)의 창립자였다. 엄청난 재산이 있음에도 값싼 전자시계를 차고 다녔으며, 개인자동차나 전용기도 없었고 해외로 갈 때는 늘 값싼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다. 1988년 미국 경제지에 “부유하고 냉철하고 돈만 아는 억만장자”로 소개되었던 그는 돈만 아는 억만장자로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의 회계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자신의 재산 중 99%를 남몰래 기부하고 있었던 아름다운 부자였음이 밝혀져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척 피니는 자신이 기부한 것이 밝혀지면 지원을 끊겠다며 대부분의 기부활동을 익명으로 해왔다. 척 피니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마6:3-4)는 예수님의 말씀과 받은 이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면 절대 자랑하지마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돈은 매력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 없다고 했다. ‘평생의 사업’을 마친 피니는 2020년 9월 14일에 애틀랜틱 필랜트로피의 해체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지난 40년 동안 사회에 환원한 금액은 80억달러(약 9조4000억원)에 달했다.척 피니는 “부유한 죽음은 불명예스럽다”는 말을 하며 "살아있을 때 기부하자(giving while living)“는 좌우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나는 오늘 가치 있는 일을 지원함으로써 그렇게 많은 선을 성취할 수 있는데 기부를 미룰 이유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죽어서 주는 것보다 살아 있는 동안 주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부(富)를 좋은 일에 기부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자신과 가족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풍부한 원천이었다고 했다. 척 피니는 80억 달러의 재산을 기부한 후 아내 헬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검소한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차나 사치품도 없다. 그의 집에는 ‘80억 달러 기부’ 사실을 보여주는 그 흔한 트로피나 행사 사진 한장 없다. 그는 빈털터리가 됐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이러한 척 피니에 대해 워렌버핏(Warren Edward Buffet:1930~ )은 “나의 영웅이고, 빌게이츠의 영웅이다. 그는 모두의 영웅이어야 한다.”라고 그를 평했다. 빌게이츠 역시 척 피니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 호랑이는 죽을 때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한다. 우리는 죽을 때 많은 돈을 남기고 떠난 사람의 후손들이 거의 대부분 심하게 다투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누구나 한 평생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래도 그가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밝게 바꾸어 놓았다”라고 평가되며 남겨진 이미지가 긍정적이라면 그는 성공한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부를 남겨 놓아 그 후손들이 재산 상속 때문에 볼썽사나운 싸움을 벌였다면 그의 삶은 카네기의 고백처럼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일”이 되어 인생 실패자의 이미지를 남겨놓게 될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가 되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건강한 정신이 있을 때 미리 베풀고 비워두는 것이 현명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주저주저하다가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놓친 채 죽음으로서 인생을 치욕적이며 불명예로 마감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 척 피니의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자(Giving While Living)” 는 인생 좌우명에 공감이 간다. 그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기부하는 동안은 계속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