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소망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삶 ⑧한스 홀바인의 죽음의 춤 10 40. 최후의 심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로마서 14장깨어 있으라 기도하라 어느 때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24장 홀바인의 ‘죽음의 춤’ 마지막 두 번째 그림은 최후의 심판이다. 천사와 성자들로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구체 위에 걸쳐 있는 무지개 위의 왕좌에 앉아 있다. 그리스도는 양손을 펼쳐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음으로 인해 생긴 상흔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이 죽음을 피하지 않으신 것은 죄의 삯인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이 죽음을 통해 성자 하나님은 죽음을 이겼고, 부활로 그것을 증명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는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1-23)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20) 바로 여기에 믿는 자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요, 고달픈 인생을 마무리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죽음 뒤에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 때문에 믿는 자의 마음속에 죽음은 절망이 아닌 소망을 낳는다. 이런 이유로 그림 하단에 구체를 빙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하려는 듯 그리스도를 향해 두 팔을 뻗치고 구원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모두 벌거벗고 있다.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은 죽음과 함께 다 내려놓아야 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들의 벌거벗은 모습은 최후 심판의 자리에 섰을 때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서 무엇을 보실까? 무엇을 찾으실까? 자문하게 만든다. 홀바인의 그림은 대답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했던 믿음이라고. 현세에서 이들은 이런저런 세상적인 것들에 의해 차별화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동등한 존재로 서 있다. 현세에서 명성과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이제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도서 5:15) 현세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신분의 삶을 살았다 해도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 질병으로, 가난으로, 전쟁으로 비통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해도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3-4) 구원의 소망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그림과는 달리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재판관의 칼이나 지옥의 형벌은 나타나지 않는다. 더는 죽음을 의인화한 해골도 보이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이제까지의 그림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홀바인은 타락의 결과를 보여주는 그림을 통해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성경에서 찾은 답을 제시한다. 죽음은 죄에 대한 처벌이다. 이제 홀바인은 최후 심판의 그림을 통해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성경에서 찾은 답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다. 홀바인은 최후 심판 그림을 통해 인간이 죄의 처벌로 받은 죽음을 이기고 영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 재판관이 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므로 항상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홀바인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이에게 말한다. 이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올지 모른다고.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하고 있으라고. 어떤 심판을 받을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라고. 이 메시지는 마지막 그림인 죽음의 문장을 통해 보는 이에게 다시 한번 강력하게 전달된다. 41. 죽음의 문장(紋章)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서 7장 홀바인의 ‘죽음의 춤’ 마지막 그림에는 매우 기괴한 구도를 한 죽음의 문장(紋章)이 나온다. 관 모양의 투구 장식은 해져서 찢어진 천 조각, 모래시계, 위로 뻗은 해골의 두 팔과 돌덩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죽음의 문장 좌우에는 이 ‘죽음의 춤’ 전체를 봉인이라도 하는 듯 홀바인과 그의 아내로 보이는 남성과 여성이 서 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해골은 입에 뱀으로 보이는 물체를 물고 있다. 높이 치켜든 양손에는 당장에라도 내던지려는 듯한 큼직하고 날카로운 돌덩이를 들고 있다. 이 돌덩이에 맞는 사람이 다음에 죽음으로 소환될 인물일 것 같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돌덩이 아래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 안에서는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술술 흘러내리고 있다. 매한가지로 인생의 시간 역시 멈추어 기다리지 않고 종말을 향해 쉼 없이 신속하게 흘러가고 있다. 모래시계 속의 모래는 죽을 때 이 세상의 것은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손가락 사이로 덧없이 빠져버리는 한 줌의 모래와도 같음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몸도 매한가지다. 아무리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봤자 흙으로 돌아간다는 영원불변한 진리에는 예외가 없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도서 3:20 홀바인의 ‘죽음의 춤’을 감상하고 있자면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가 핵심 메시지인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본 전제다. 각 등장인물이 죽는 순간에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홀바인의 ‘죽음의 춤’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보는 이에게 ‘당장 죽어도 아무 문제 없겠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소?’, ‘당신은 어떻게 살다가 죽겠소?’라고 묻는 듯하다.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아모스 8:7) 홀바인의 ‘죽음의 춤’에 해골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림을 보면 평온하고 복된 죽음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노파와 노인 장면은 예외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등장인물 거의 다가 잠시 전까지 하던 일을 당장 멈추고 삶과 이별해야 할 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죽음의 기술이 베푸는 가르침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듯, 죽음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다. 등장인물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에 몰두하고 있다. 어떤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일인 듯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는 듯하다. 그들이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죽음이냐를 선언하는 최후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살았다면 과연 저런 삶을 살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홀바인의 ‘죽음의 춤’에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34편의 그림을 보고 나면 모든 장면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등장인물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맘몬’을 섬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그림들은 불의, 불공정, 불평등, 탐욕, 관직 매매, 뇌물수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의 철저한 결핍, 돈과 권력을 지닌 자들의 호화스러운 의상과 진수성찬 등을 고발하고 있다. 이런 인간 행태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돈 만능주의’가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을 사로잡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옛 사람”이요(로마서 6:6), 참된 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6:3)이다. 이들은 여전히 죄의 종(6:20)이요 의의 종(6:19)이 아니다. 죄의 종은 불의의 열매를 맺고, 그들의 최후는 사망이다. 이제 이 마지막 그림은 관람자에게 경고한다. 당신이 다음 순서가 될 수 있으니 죽음과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며 살라고.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품은 삶을 살라고.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시편 89:47 ♠ 끝 ♠ 참고자료 https://www.gutenberg.org/files/21790/21790-h/21790-h.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