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소망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삶 ①죽음 준비의 절실한 필요성 2019년 10월, 암이 갑작스레 나를 찾아왔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느닷없는 급습처럼 느껴졌다. 기도와 찬양 가운데 주님 손을 꼭 붙잡고, 주님만 바라보며 수술과 항암 치료를 비롯해 암 투병 과정을 묵묵히 견디며 인고했다. 이 과정에서 죽음에 새롭게 직면했다. 죽음에 대해 글도 쓰고, 죽음을 묵상하며 대비한다고 했지만 막상 암 투병을 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죽음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신체적이고 생리적인 변화가 초래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의 죽음의 위협은 참으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과 나의 관계는 수시로 역전되었다. 내가 죽음을 다루기보다는 죽음이 나를 다루었다. 내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가 나에게 죽음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죽음은 나를 엄습하며 줄곧 집어삼키려 위협했고, 나라는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대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영과 실존 속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고, 나는 어떤 형태로든 죽음의 시험과 유혹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익숙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훈련을 할 필요를 더욱 통감했다. 여기에 쓰는 일련의 글은 이런 마음 자세에서 나왔다. 한국은 2000년에 65세 이상 노인이 총인구의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2017년에는 고령사회(14% 이상)가 되었고, 이제 초고령 사회(20% 이상)를 향해 초고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속도다. 4~5년 뒤인 2025년이나 2026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다섯 명에 한 명꼴이 된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노인 문화 창조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여기에는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존엄한 죽음 문화도 포함된다. 특히 부활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과제에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質) 지수’(Quality of Death Index) 조사에서 영국이 1위를 차지했다. 출처 90세 할머니 연명 치료 중단 어린 증손자까지 동의하라니 | 중앙일보 (joongang.co.kr) 영국은 2008년부터 고령화가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가 너무 부족함을 인식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죽음’(good death)을 위한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로 의료 인프라(practice), 정책(policy), 사회인식(public)의 변화와 함께 ‘죽음의 질 지수’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좋은 죽음’이란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가족·친구와 함께’, ‘고통 없이’ 사망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32위를 차지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을 위한 준비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적신호다. 2015년에는 8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18위로 올랐다. 그나마 의료시설 및 의료진의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덕택이다. 출처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8/2015100800195.html 영국이 1위, 대만이 6위다. 대만 국민은 아시아에서 가장 품위 있고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민·관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고 한다. 특히 “죽음, 듣고 말하고 봐야한다(Facing death, Must listen, Must talk, Must see)” 캠페인이 죽음을 대하는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대만호스피스재단과 전문 학회 등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며 “죽음 교육”을 실시하면서 지역사회의 참여 빈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죽음의 질이 안 좋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 자체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질은 삶의 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조사하여 공표한 BLI(Better Life Index) 지표에 의하면 회원국 중 우리나라 국민의 삶의 질은 하위권에 속한다. 2017년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BLI 순위는 38개국 중 29위였다. 2016년에는 28위, 2015년에는 36개국 중 27위였다.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나라가 GDP 순위 15위에서 10위 사이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양적이고 수적인 경제성장에 비해 삶과 죽음의 질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사실 삶과 죽음의 질을 희생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죽음의 질이 낮은 만큼, 우리 사회가 노령화와 죽음의 일상화 및 존엄사 논쟁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죽음 담론을 활성화하고 정립하며, 품위 있는 죽음 문화를 만드는 작업은 이제 필수적인 당면 과업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과제를 수행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내세관이 약한 유교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깔려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외면하고 망각하고 싶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대 의학과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며, 인간이 불멸할 수 있는 듯 믿고 처신하는 태도 역시 죽음에 대한 공론화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처럼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막상 죽음이 닥치면 사람들은 당혹해하고 공포감에 휩싸인다. 이것은 죽어가는 자나 죽음을 지켜보는 자나 매일반이다. 더 나아가 죽음학 또는 생사학에 관한 글은 하나같이 지적한다.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고 죽음의 질과 삶의 질은 비례한다고. 이를 고려해 볼 때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곧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학교에서 이미 죽음을 준비시키는 교육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않다. 대만의 경우만 해도 중학교부터 교과 과정에 ‘생사(생사)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초등학교에서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다양한 형태의 죽음·호스피스 관련 교육 자료가 보급되어 있다. 죽음 교육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결정짓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행히 이와 같은 인식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급속히 진행되는 고령화를 비롯해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여러 요인이 죽음을 진지하게 다루게 촉진하면서 한국의 상황도 조금씩이나마 달라지고 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1991년 창립),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2004년 설립), 한국 죽음학회(2005년 창립) 등이 죽음 담론과 죽음 준비교육을 활성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 죽음은 다양한 인문학 강연의 주제로도 선정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강의를 모아 놓은 예일 대학교의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의 책 『죽음』(Death)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이 잘 입증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이처럼 고령화 현상과 함께 웰다잉(well-dying) 또는 웰엔딩(well-end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 속에 최근 죽음과 죽는 법에 대한 글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 내에서 죽음과 죽는 법 또는 죽음의 기술(ars moriendi)에 대한 관심은 아직 미미한 상태다. 이는 한국 개신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우리 사회의 근현대 문화와 가치관 및 세계관 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죽음 문화, 죽음관, 그리고 죽음의 기술을 정립하고 제시하는 일은 한국 개신교의 중대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곧 부활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산다. 죽음 담론이 부활 담론과, 죽음 문화가 부활 문화와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죽음 준비는 곧 부활 준비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 준비를 넘어 부활 준비까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질문을 하면서 다음에 이어질 일련의 글을 통해 중세 시대의 죽음 문화가 알려주는 지혜와 개신교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의 죽음 문화 개혁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