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소망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삶 ② 죽음을 망각하고 싶은,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현대인 인간의 처신 방식 중 하나를 일컫는 말로 ‘오스트리치즘’(Ostrichism)이라는 표현이 있다. 오스트리치는 타조이므로 이 동물의 특정한 습성과 관련된 말임을 눈치챌 수 있다. 쫓기던 타조가 궁지에 몰리면 머리를 모래에 파묻고 안전한 듯 착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현실 도피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 전달하는 메시지는 달라도 ‘장두노미’(藏頭露尾)라는 사자성어나 ‘타조세대’(Ostrich Generation)라는 표현도 기본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도 가만히 보면 ‘오스트리치즘’이 있는 듯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고 회피한다. 또는 현대 최첨단 의술이 온갖 질병은 물론이거니와 죽음까지 치료하고 이기리라는 막연한 낙관적 확신을 갖고 죽음을 망각하고자 한다. 하지만 죽음에 직면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어도 죽음이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는다. 죽음은 끝끝내 우리를 데려간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끝까지 죽음에 굴복하지 않으려 허둥지둥 발버둥질하다 끝내 억지로 죽음에 끌려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는 『죽음 앞의 인간L’homme devant la mort』에서 중세부터 현대까지 죽음의 역사를 펼쳐 보여준다. 중세 초기에는 죽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16세기에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대했다. 17세기 이후에는 시체를 종종 묘한 관능적인 대상으로 그렸다. 18세기에는 많은 문학 작품이 죽은 자들과의 연애담을 풀어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죽음을 아름다운 유혹거리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죽음이 갑작스레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통해 저자는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 사람들이 시대마다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다르게 죽어갔음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려준다. 아리에스의 말이 다 맞지는 않다 해도 수백 쪽에 이르는 책을 훑고 나서 덮을 때 남는 요지는 분명하다. 현대인은 죽음을 멀리하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20여 년 동안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본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의사 리디아 더그데일(Lydia S. Dugdale) 역시 같은 지적을 한다. 그녀는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죽음을 배우다The Lost Art of Dying: Reviving Forgotten Wisdom』라는 책을 내놓았다. 원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상실한 죽음의 기술: 잊힌 지혜의 회복”이다. 여기서 더그데일은 중세 시대부터 500년이 넘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했던 서구 사회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고민을 멈췄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이제 서구 문화는 더 이상 잘 죽는 법을 고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그데일은 레지던트 시절 경험한 이야기를 나눈다. 암 환자였다. 이 환자는 하룻밤 사이 세 번 죽을 고비를 맞았다. 처음 두 번은 의료진이 심폐소생술로 이 환자를 죽음에서 다시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환자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하는 과정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들었다. 세 번째 시도에서는 의료진도, 의료장비도, 환자도 죽음에 굴복해야 했다. 이미 암세포가 심각하게 전이된 상태에서 치료를 견뎌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의술이 죽음도 극복하리라 확신하며 치료를 고집했다. 더그데일은 이러한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환자는 과연 현명하고,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더그데일은 어떤 의사가 병원을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으로 묘사한 것을 언급한다. 20세기 초반, 헨리 포드는 짐승을 부위별로 분해하는 도축장에서 영감을 받아 자동차 조립라인을 도입했다. 의학계가 효율을 추구하는 방법도 자동차 조립 공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는 병원 문턱을 넘는 순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온 상품처럼 취급된다. ‘노동의 분업’을 이루어 낸 의사, 간호사, 재활치료사, 의료 기술자는 각각 주어진 의무에 따라 증상을 상세히 살피고, 의료장비를 다루고, 상태 변화를 관찰하는 등 효율적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환자가 병원에 와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고, 치료를 받은 뒤 다시 병원을 나가는 과정이 왜 문제가 될까? 이에 대해 더그데일은 문제는 효율적 치료 방법 자체가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가 죽음을 향해 가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현대인이 맞이하는 이런 유의 임종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부각하면서 더그데일은 역사 속에서 죽음을 준비한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조언이다. 물론 치료나 회복될 희망을 쉽게 포기하라는 말도, 죽음이 단순하거나 쉬운 문제라는 이야기도, 죽음을 미화하자는 것도 아니다. 효율적인 치료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막상 처절히 고통을 겪으며 죽음의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라거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하는 것은 얼마나 조심스럽고 차마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일인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처지로 인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존엄하고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관문에 불과하며 부활과 영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역사 속에서 죽음을 준비한 지혜를 배우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하는 시기와 장소가 있다. 바로 중세 유럽이다. 여기에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죽음에 대한 경험과 관심이 유달랐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한번 관심을 끈 14세기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1347년에 창궐하기 시작해 1351년에 러시아까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D%91%EC%82%AC%EB%B3%91 유럽 총인구의 30~60%가 순식간에 세상을 떴다. 더 많은 인구가 사망한 곳도 있었다. 시체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고, 사방이 공동묘지가 되었고, 매 순간이 죽음과의 대면이었다. 14세기 초 유럽에서는 중세온난기가 막을 내리고 연 평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대기근이 발생했고, 북유럽 쪽의 피해는 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337년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145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일까? 단지 이것만이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 중세 유럽인들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