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소망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삶 ⑦파리의 죽음의 춤 II 첫 번째 그림에서 권위자는 “가장 위대한 자들이 먼저 시작하는 것을 볼 것이네”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제 두 번째 그림부터 죽음이 등장해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두 인물인 교황과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국가에서 각 신분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줄줄이 소환해간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회적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고관대작이든 미관말직이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교황과 황제 교황과 황제가 나오는 그림에서 죽음은 살아 있는 이들(예를 들면 그림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언젠가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의 춤을 추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교황은 죽음의 소환에 전혀 기쁘지 않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권자이지만 죽음까지 통치하며 그의 뜻에 굴복시킬 수는 없다. 그가 죽음에 굴복해야 한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황제에게 다가간 죽음은 왕권의 표장인 그의 홀과 보주(寶珠)와 무기를 남기고 떠날 것을 명한다. 황제는 깨닫는다. 앞에 나타난 시체처럼 이제 자신도 곡괭이와 삽과 수의로 무장할 시간이 되었음을. 현재 황제의 모습이 한때 시체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황제의 모습은 시체의 모습이 될 것이다. ‘죽음의 춤’은 거울 역할을 한다. 산 자 앞에 등장한 죽은 자의 모습은 어떤 흉측한 타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성당 참사회원과 상인 이 그림에서 성당 참사회원은 죽음 앞에서 입고 있는 회색 털 망토를 포기해야 해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의사와 구혼자 이 그림에 나오는 의사의 모습은 ‘죽음의 춤’에 등장하는 모든 의사의 모본이 된다. 의사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환자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소변이 담긴 유리병을 검사하고 있다. 당시 소변 검사는 건강 상태를 알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은 죽음으로부터 구하지 못한다. 환자의 소변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는 의사의 옷을 해골이 잡아당기고 있는데, 그 잡은 부위를 보면 마치 해골이 의사의 소변을 검사해보고 사망 선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사는 어떤 약초도 뿌리도 치료약도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내지 못할 것임을 깨닫는다. 그림 하단에 나오는 죽은 자와 의사의 대화에서 의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 맞서 어떤 약도 없다.” 마지막 그림에는 권위자(저자)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죽은 왕의 시체 앞에 앉아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권위자/저자와 죽은 왕 이 이야기를 보는 그대들은 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낙원의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훈계해주기 때문이다.천국에서 축제를 거행하는 자는 복되도다.그러나 낙원이 어떠한지에 대해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는 자들도 있다네.그들은 지옥의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예전에 성자들이 쓴 책들이 있다네.이 책들은 아름다운 말로 그것을 보여준다네.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라.그리고 선행을 베풀어라. 더 이상 나는 말하지 않으련다.선행은 죽은 자들을 위해 많은 공로가 되리니. 권위자의 조언처럼 죽음의 춤을 잘 들여다보고 있자면 거기에 담겨 있는 귀한 지혜를 깨닫게 된다. 가는 것은 온 순서대로가 아니다. 일단 죽음의 때가 닥치면 죽음은 산 자에게 죽을 준비가 되었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죽을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도 않는다. 불시에 찾아와 끌고 간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급습하는 죽음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 각자가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 수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전체적으로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배경에는 풀 몇 포기만 있을 뿐이다.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는 일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다. ‘죽음의 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춤을 추는 동작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춤에 필요한 음악을 상징하는 단서도 없다. 해골과 짝을 이루고 있는 각 신분을 대표하는 인물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며,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지도 않다. 해골 몇몇은 곡괭이, 삽, 또는 창을 들고 있지만 이것을 무기나 협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림을 잘 들여다보고 있자면 해골들이 이제 곧 죽을 사람을 붙잡으면서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희죽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과 함께 나오는 글에는 이런 만남이 죽음을 초래한다고 적혀있기 때문에 이 모든 그림은 죽음의 장면을 나타낸다. 그래서인지 해골은 상대방을 댄스 파트너로 취하지만 어떤 파트너도 표정이 즐겁지 않다. 해골의 손이 닿은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 있거나 당황한 모습이거나 도망하고 싶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갈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표시다. 죽음에 의해 갑작스레 댄스 파트너로 선택받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임을 알려준다. 더욱이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생각해 볼 때 심판대 앞에 설 자신이 없는 듯하다. 아니면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살아온 듯하다. ‘죽음의 춤’은 하나의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보도록 이끈다. 춤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죽음의 춤 역시 시간을 두고 충분히 연습할 필요가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죽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추구한 삶이 덧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죽을 수 있도록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준비는 죽음이 사후 심판을 통해 어디로 이끌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죽음 다음이 지옥이요 영원한 죽음일 수도 있고, 천국이요 영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다면 죽음이 급습하여 갑작스레 호출하기 전에 미리미리 영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서 권위자는 외친다. 선행을 베풀며 살라고. 하지만 이런 것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권위자도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이제 그림을 보며, 글을 읽는 이들에게 달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것인지, 한 귀로 듣고 마음속에 새겨 행동으로 옮길 것인지. 로마서 8:5-8과 8:12-13 말씀이 떠오른다.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12b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현재 프랑스의 교통망 지도를 보면 이노상 공동묘지 자리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를 보며 이노상 공동묘지에 있던 ‘죽음의 춤’ 벽화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마치 ‘메멘토 모리’의 외침이 프랑스 전역으로 뻗쳐 있는 교통망을 타고 퍼져나가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 세계로. 출처 및 참고문헌http://www.dodedans.com/Eparis.htm울리 분덜리히/ 김종수 역. 『메멘토 모리의 세계: ‘죽음의 춤’을 통해 본 인간의 삶과 죽음』. 도서출판 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