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죽음 ①죽음을 알고 준비하자 I. 들어가며 이제 개신교의 원조인 마르틴 루터는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바처럼 한국 사회는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가 되고, 2040년이면 인구 3명당 1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과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 개신교 내에서도 죽음관, 죽음의 기술, 죽음 준비교육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이 같은 당면 과제를 풀어갈 때 죽음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먼저 두 가지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첫째, 루터가 다루는 죽음 문제는 설명은 할 수 있지만 하나의 논리 정연한 서술의 틀 안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주제다. 둘째, 죽음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지, 사변적이며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와 함께 명심해야 할 사항은 흑사병(1346-)과 백년전쟁(1337-1453) 등으로 중세 후기 유럽인들에게 죽음은 매일매일 고군분투해야 할 실존적 문제였다는 점이다. 1483년에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난 루터에게도 죽음은 매 순간 직면하며 씨름해야 할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1505년 7월 2일에 루터는 주변에서 무섭게 내려치는 번개에 강력한 죽음의 위협을 경험했다.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의 전도유망한 법대생이었던 루터는 곧바로 자퇴했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회에 입회했다. 수도원에서는 절대적 의(義)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 떨었다. 1525년에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험난한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가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3세출처 wikipedia.com 1527년 8월 2일에는 유럽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간헐적으로 발발한 전염병(흑사병) 때문에 교수진과 학생들이 예나(Jena)로 피신했다. 그러나 루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떠나지 않고 맡은 임무를 조금씩이나마 계속 감당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병자들을 받아들여 돌보았다. 참으로 아수라장이요 죽음의 세계 그 자체였다. 당시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는 임신 중이었다. 마침내 역병은 지나갔고 카타리나는 출산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Elisabeth)는 생후 8개월도 안 되어 부모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떴다. 역병의 영향이었을까.... 42세에 결혼한 루터가 44세에 얻은 둘째 자녀이자 첫째 딸이었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번뇌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루터와 카리나 폰 보라출처 maidensandmanuscripts.com 전염병에 걸려 앓고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루터출처 flickr.com 59세에는 세 번째 자녀요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막달레나(Magdalena) 마저 떠나보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을 형성하고 주도한 철인과 같은 루터도 억장이 무너졌다. 지혜롭고 유능한 아내 카타리나와 함께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렸던 것을 고려해 볼 때 루터 부부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막달레나의 죽음출처 wikipedia.com 루터 가족(처음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짐)출처 flickr(flickr.com) 루터가 가족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있다출처 flickr.com 게다가 루터 자신도 협심증과 심장마비와 신장 결석과 요로폐색 등과 같은 육신의 온갖 질병으로 여러 차례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참으로 루터는 일평생 지속해서 죽음과 고투해야만 했다. "루터와 죽음"에 대한 본 글은 이라이프아카데미의 취지에 맞춰 다음 글을 재정리한 것이다. 김선영,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신학·교회·사회 개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9장 “루터와 죽음”(310-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