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죽음 ②죽음을 알고 준비하자 II. 신학적 죽음과 부활의 개념 1. 죽음의 기원과 정의 루터는 창세기 1장 26-2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다루면서 죽음의 기원에 대해 언급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야기되었다. 이와 함께 루터는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오는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아담은 창조될 때 의로운 상태였다고 말한다. 이때만 해도 죄가 없었기에 만약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했다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고 원래 창조된 상태 그대로 있었다면, 그는 자연인으로 살다가 죽음을 거치지 않고 영원한 영적 삶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출처 wikipedia(wikipedia.com) 여기서 루터는 만일 첫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이 아닌 더 나은 삶으로의 이동을 계획해 놓았다고 답변한다. 하나님은 현세의 삶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따라서 첫 인간이 설령 죄로 인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해도 낙원 생활을 계속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첫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담이 현세적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표시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라고 가르친다. 만물은 본래 사멸하며,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 운명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은 죄에 대한 처벌로 주어졌다. 성경은 죽음이 첫 인간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이며 이 죄에 대한 처벌임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아담은 일정한 때가 이르면 육체적 삶에서 영원한 영적 삶으로 옮겨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죽음은 타락 이후 현세에서의 삶인 자연적 또는 동물적 삶과 미래의 삶인 영원한 영적 삶 사이에 존재하는 “끔찍한 중간 사건”이다. 만약 첫 인간이 무죄 상태를 유지했다면 이 “중간 사건”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의해 아담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영적 삶 또는 천사의 삶(마 22:30)으로 순조롭게 옮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담의 죄와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운명이 그의 후예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루터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대한 강해 설교에서 설명한다. 아담의 후예인 우리는 그의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죄성과 죽음을 물려받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아담의 후예로 태어날 때 아담의 죄와 그가 받은 처벌은 우리 자신의 죄와 처벌이 된다. 루터는 이것을 “비참한 거래요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바꾸어 놓기 위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을 또 다른 사람을 보냈다. 그는 첫 번째 사람과 대조되는 두 번째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 살 기회도 얻었다. 2.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 두 차원 이제 죽음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죽음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루터의 글을 읽다 보면 놓칠 수 없는 특징이 드러난다. 그것은 루터가 그리스도인과 관련해 죽음의 두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터는 이 두 차원을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의 핵심적 개혁 사상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 내용은 부활절 수요일에 행한 골로새서 3장 1-7절에 대한 설교, 그리고 부활절 후 첫 주일에 행한 요한1서 5장 4-12절에 대한 설교에 잘 나타난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대한 설교에서 루터는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와 함께 영생을 누리며 영원한 영광 가운데 살 것을 확신하고 그러한 영적 삶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면서 루터는 이런 영생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을 언급한다. 그것은 “먼저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생물학적 죽음과 함께 인생 중에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후자의 죽음은 전자의 죽음의 형태와 그 이후 누리게 될 부활과 영생의 “불가피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두 차원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두 차원으로 연결된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대한 설교에서 루터는 바울이 언급한 “영적 부활”을 다룬다. “만약 우리가 최후 심판의 날에 우리의 육신 가운데 육체 그대로 부활해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여기 이 세상에서 앞선 영적 부활을 경험했어야 한다.” 생물학적 죽음 후에 영생을 위한 부활이 있지만, 그 전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뒤 경험하는 영적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루터는 로마서 8장 11절을 다루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하나님이 당신을 영적으로 되살리고 의롭게 하고 구원했으므로 살아있는 영의 건물 또는 성막인 몸을 잊지 아니할 것이다.” 즉, 이생에서 영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으므로, 부패하기 마련인 몸 또한 무덤으로부터 부활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구원받고 부활한 영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영과 육신은 영생을 위해 재결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부활: 승리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영생의 “불가피한 조건”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자. 세속적 삶은 영적일 수도 육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영적인 세속적 삶과 육적인 세속적 삶이 있다. 첫째, 영적인 세속적 삶과 행위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영혼이 말씀과 신앙 없이 하나님을 경멸하며 사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스스로 고안한 잘못된 교리로 남용하는 일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유사한 죄를 저지르도록 속이기 때문에 가장 악하고 해로운 죄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가장 먼저 이런 영적인 세속적 삶과 행위에 대해 죽어야 한다. 둘째, 육적인 세속적 삶과 행위로서 간통, 부정, 탐욕 등과 같은 악이 있다. 이러한 죄는 몸과 몸의 지체들이 저지르기 때문에 육욕적인 또는 몸을 더럽히는 죄라 불린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삶에도 죽어야 한다. 여전히 육욕에 따라 사는 자는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해 죽지 않은 자다. 여기서 루터가 제시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이생에서 새사람으로의 탄생을 위해 필수적인 옛사람의 죽음이다. 이는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사건이다. 새 창조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이다. 이런 죽음을 삶에서 입증하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죽은 자요, 그도 그리스도에게 죽은 자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 안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셈이다. 이러한 죽음이 중요한 이유는 이 죽음이 없으면 영적 부활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으로 영생으로 나아가는 문으로서의 죽음과 그 이후의 부활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만약 우리가 최후 심판의 날에 우리의 육신 가운데 육체 그대로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 이 세상에서 앞선 영적 부활을 경험했어야만 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앞선 영적 부활”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를 다루는 요한1서 5장 4-12절에 대한 설교에 잘 풀어져 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은 사람이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 한다면 자연적 탄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자연적 탄생을 통해 세상에서 소유하고 성취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적 존재를 위해서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인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삶을 고대한다면 새로운 종류의 탄생이 필요하다. 이것은 자연적 탄생보다 더 중요한 탄생으로, 신적 탄생, 즉 하나님이 부모가 되는 탄생이다.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야 할 필요성에 대한 루터의 강조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는 강조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 의한 새로운 탄생은 그리스도인을 지상의 모든 통치자 위에 존재하는 참된 통치자로 만든다. 이 새로운 탄생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이길 능력을 준다. 그들은 물리적 힘이나 세속 권력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영적 탄생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영적 탄생으로 세상을 이길 능력을 얻는 것은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왕국, 그리스도의 천상의 왕국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통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들을 믿음과 말씀 안에서 보존하고 사탄으로부터 보호한다. 더욱이 그를 따르는 자들을 그의 천사들과 백성을 통해서도 통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 자가 삶과 행위에서 믿음의 능력과 활동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즉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 인한 공포와 고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루터는 “사탄에 대한 승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시”라고 강조한다. 2) 자연인의 죽음과 부활: 최후의 승리 그리스도인의 죽음 및 부활과 관련해 두 번째로 다루어야 할 내용은 자연인의 죽음과 그 이후에 일어날 부활이다. 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불멸의 육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영혼과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즉 죽음에서부터 부활 전까지 영혼과 몸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 우선 루터는 생물학적 죽음 이후 부활까지 영혼은 잠을 잔다고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에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런 선제후가 1519년에 회복이 불가하다고 여겨질 만큼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이때 루터는 게오르크 슈팔라틴(Georg Spalatin)의 요청에 따라 『열네 가지 위로의 말씀』을 써서 프리드리히에게 바쳤다. 슈팔라틴은 궁정 목사이자 프리드리히의 개인 비서였다. 또한 루터의 친구로서 선제후와 루터 사이에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글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껍데기로만 남아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른다(마 9:24; 살전 4:13)고 언급한다. 1522년에 친구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Nicolaus von Amsdorf)에게 보낸 한 서신에서 루터는 생물학적 죽음과 마지막 심판 사이에 연옥과 같은 어떤 중간상태도 허용하지 않는 영혼의 잠에 대해 다루었다. 이후 루터는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처할 상태와 관련해 영혼의 잠에 관한 견해를 가장 적절한 이해로 채택했다. 다만 루터는 성경에 예외적인 구절들이 있음을 의식하면서 영혼의 잠에 대한 견해를 하나의 절대적 교리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서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같이 나타나는 마태복음 17:1-9, 예수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하는 누가복음 23:39-43 등이 있다. 이제 루터는 죽음 이후 영혼이 즉각 심판받고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이동한다는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루터는 몇 세기에 걸쳐 수용되던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침의 강조점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부활 때까지 죽음은 잠과 같다고 묘사했다. 또한 1525년에 사순절 설교를 하면서 사후 영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경에서 죽음 역시 잠으로 불린다.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갑작스레 깨어나는 사람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모르듯, 우리 역시 최후 심판의 날에 우리가 죽음 가운데 있다가 죽음을 통과했음을 알지 못한 채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 사도행전 13:26-39에 대한 설교에서도 루터는 “죽음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달콤한 잠, 그렇다, 영생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1530년에 쓴 『연옥의 폐지』에서도 루터는 영혼의 잠을 강조한다. 여기서 루터는 연옥을 옹호하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다양한 주장을 논박하고 죽음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잠으로 제시한다. 주님 안에서 죽은 의인은 이사야 57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죽을 때 평안히 간다. … 그래서 그들은 잠을 자는 사람이라 불리며, 성경 전체에서 그들의 죽음은 잠이라 불린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대한 해석(1534)에서도 루터는 바울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잠이요, 땅에 묻혀 있는 그리스도인은 잠자는 자다. 미래에 경험할 그리스도인 몸의 부활은 이러한 잠에서 갑자기 깨어나는 경험에 비교할 수 있다. 육신이 땅속에서 부패한다 해도 죽음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깨워 일으키기 전에 자는 한 밤의 깊은 잠에 불과하다. 또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미 이생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영적인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발버둥질하며 회피해야 할 두려운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씨앗은 땅속에서 썩어야만 싹을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본성상 불순하고 부패하기 쉬운 지상의 것, 즉 육신을 소멸시키고 땅에서 부패하게 만든다. 이는 지상의 사람이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천상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첫 번째 창조 때 흙으로 몸과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창조 때에는 그 사람을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피조물로 만들어 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