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죽음 ④죽음을 알고 준비하자 IV. 죽음의 기술(ars moriendi) 중세 후기 유럽인들에게 죽음은 결코 낯선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역에 따라서는 80%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과 백년전쟁과 같은 지속적인 전쟁 가운데 중세 후기 유럽인들은 늘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기 위해 애썼다. 그뿐만 아니라 장례식과 위령미사, 그리고 1476년 이후에는 연옥에서 영혼이 받는 처벌을 감하는 면벌부 판매를 통해 죽은 자들과 남은 자들에게 목회적 도움을 베풀고자 노력했다. 사제와 평신도가 죽음을 목전에 둔 병자를 돌볼 수 있게 안내하는 글이 많이 나왔다. 죽을 때 사용된 위로의 글이 16세기 인기 도서였는데 이는 이 같은 글의 인기를 잘 보여준다. 죽음과 관련해 세 유형의 전통이 15세기와 16세기에 널리 퍼져 있었다. 첫째는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 죽음의 기술)로 잘 죽는 기술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에 관한 것이다. 셋째는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 죽음의 춤)로 죽음과의 춤에 관한 것이다. 이 개념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환영할 대상이기도 하다는 양면성을 전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다룬 바 있다. 1536년에 루터는 한 설교에서 죽음을 준비하게 돕는 책이 많이 나와 있지만 대부분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고 사람을 오히려 우울하게 만든다고 꼬집는다. 그리고 복음, 세례, 참된 가르침, 그리고 소명 안에서 견디는 일 등을 통해 죽음을 올바로 준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루터는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죽음의 기술’을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관한 설교』(1519)에서 제시한다. 이 글은 여러 번 재판되었다. 이는 루터의 ‘죽음의 기술’이 중세 후기의 ‘죽음의 기술’에서 더는 도움을 못 받은 수많은 사람의 영적 갈증을 풀어주었음을 알려준다. 이 글을 통해 루터는 죽음의 기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1) 세상일을 정리하라. 죽어가는 자는 자신이 죽은 후 남은 자들 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다툼과 싸움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미리미리 세상일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2) 화해하라. 죽어가는 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불화로 인해 사이가 멀어진 사람들과 화해를 추구하고, 얽히고설킨 일들과 감정과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영혼의 평안을 찾고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힘을 파악하라.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죽음의 기술’을 제시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죽어가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힘을 올바로 파악할 때 죽어가는 자는 모든 죽음을 삼켜버리고, 정복하고, 실제로 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비교해 볼 때 자기의 죽음은 일시적인 잠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듯이 하나님이 죽은 이들을 그들이 머무는 곳에 그냥 방치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이끌 것이기에 죽음은 일시적인 잠에 불과함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출처 wikipedia(wikipedia.com) 루터는 죽어가는 자가 죽음을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두 개의 성경 본문을 다룬다. 마태복음 7장 14절을 통해서는 “좁은 문”의 이미지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어려운 길”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요한복음 16장 21절을 통해서는 산모의 산고와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대조하면서 죽음의 순간과 죽음 이후의 영생을 비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를 통해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잠을 자고 깨어난 후에 경험하게 될 놀라운 기쁨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건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고, 그 뒤에 맞이할 영생과 천국의 행복을 소망하게 만든다. (4)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라. 루터는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자가 겪는 실존적이고도 영적인 고뇌를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그 고뇌를 특히 사탄이 초래하는 세 가지 형태의 이미지로 설명한다. 죽어가는 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 세 가지는 무서운 죽음의 이미지,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하나님이 예정한 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지옥에 있는 이미지다. 이런 해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사탄은 죽어가는 자에게 그의 영혼과 몸을 옥죄는 두렵고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의 죽음 준비는 사탄이 지속해서 자극하는 이런 유해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는 일을 수반한다. 만약 이러한 이미지들이 죽어가는 사람 안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게 된다면 그는 절망하고, 하나님에게 저항하고, 불순종하며 죽게 될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이런 유해하고 부정적인 이미지 중 최악의 것은 죽어가는 자가 자기 자신이 지옥에 가도록 예정되었는지를 묻는 이미지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미지는 죽어가는 자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자기의 하나님을 만들어 내게 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처럼 치명적인 이미지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과 은혜와 영생을 누리는 천국의 이미지들로 맞서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것이 죽음을 올바르게 준비하는 데 필수적임을 피력한다. 이와 함께 루터는 죽음과 죄와 지옥이라는 악성 이미지들에 대항해 생명과 은혜와 영생에로의 선택이 있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성인을 바라보며 묵상할 것을 권한다. 그리스도는 순전한 생명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자가 그 이미지를 마음속에 담고 그 이미지를 강하게 붙들수록 죽음의 이미지는 더욱 흐려지고 결국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러면 죽어가는 자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이 잠들 수 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한 그리스도 은혜의 이미지를 붙들면 사탄이 죽어가는 자 안에 초래하는 그의 죄의 이미지는 사라지게 된다.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 제단화 출처 fineartamerica(fineartamerica.com)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자는 자신의 미래 운명을 알고자 내면으로 눈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영원한 판결을 탐색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죽어가는 자는 지옥을 극복하고 믿는 자의 선택받음을 확고히 하고자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은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과 은혜와 구원(또는 천국 또는 영생)이라는 이 세 가지 축복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각인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견인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죽어가는 자는 그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몸소 유대인들의 조롱과 핍박을 이기고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함으로써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이 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죽어가는 자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죽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만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꼭 붙어 있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죄와 죽음과 지옥이 극복되었고 그것들이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확고히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미지만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스도와만 협의하고 거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일을 위해 루터는 십자가 묵상을 권면한다. 이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일이다. 이렇게 죽어가는 자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와 죽음을 정복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셨음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해 이처럼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주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죽어가는 자에게 이러한 사랑의 경험은 마음의 평안과 구원의 확신을 주기에 참으로 중요하다. (5) 말씀에 매달려라. 죽어가는 자는 행위-의의 관점에서 자신이 사는 동안 무엇을 했고 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죽어가는 자는 과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죽음에 직면한 시간은 그럴 때가 아니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와 죽음과 지옥을 삼켰고, 그리스도가 부활했듯이 나도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죄의 용서에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의 확신과 평화를 얻어야 한다. 루터는 이러한 조언과 함께 죽어가는 자는 성경에 매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살아서도 그렇지만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성경 말씀을 경청하고 그것을 꽉 붙들어야만 한다. 성격책과 십자가출처 기독일보(christiandaily.co.kr) 사탄이 율법을 가지고 ‘너는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행위-의의 논쟁으로 이끌면서 지은 죄를 기억나게 하고 영혼을 괴롭힐 때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런 때에는 즉시 ‘나의 죄’ 때문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죄 사함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매달려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죽어가면서 다급하고 혼미한 마음에 오판하여 잘못된 인간적인 생각이나 인간이 고안한 가르침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 죽은 자의 영혼에 도움을 요청한다거나 자문하는 일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이므로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 임종 시 해야 할 일은 사탄과의 논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과 평안을 얻는 것이다. (6)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꼭 붙들라. 성찬은 죽음을 통과해 영생으로 나아갈 준비를 위해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찬은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심란해진 마음과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한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성찬은 죽음과 죄와 지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의미하는 바를 베푸는 분명한 표징이요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표징으로서의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혜택이 믿는 자들에게 전달된다. 성찬은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성인과의 교제 안에 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성찬을 통해 말씀하고 보여준다. 루터는 누가복음 1장 38장에서 마리아가 천사의 말에 순종하듯, 성찬이 약속하는 바를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며 확고히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최후의 만찬출처 wikipedia(wikipedia.com) 성찬의 올바른 사용법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주시는 선물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쾌히 받는 것이다. 죽어가는 자에게 과연 그가 성찬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의 계략이다. 이러한 의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표징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불신이다. 이와 관련해 루터는 우리가 가치가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무가치한 존재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와 영생을 주었다. 게다가 죄와 죽음과 지옥이 우리를 해하지 못함을 확신시키는 말씀과 표징을 주었다. 이런 하나님은 참되며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7) 성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홀로 버려져 있지 않음을 확신하라. 죽음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는 물론, 이미 승리를 거둔 그분의 사랑하는 성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의심치 말아야 한다. 성례전적 약속과 이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연대와 후원의 공동체 안에 참여하게 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홀로 죽지 않는다. 성찬식이 보여주듯이 천사들과 성인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어 그들의 구성원인 죽어가는 자에게 달려온다. 그리고 그가 죄와 죽음과 지옥을 극복하게 도와주고, 이 모든 과정에서 그와 함께 인고한다. 여기에 사랑의 행위와 성도의 교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교제를 상상하면서 이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죽어가면서도 고독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 옆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루터출처 flickr(flickr.com) (8) 기도하라. 죽어가는 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되, 특히 하나님이 마음속에 진정한 믿음을 주고 그것을 보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을 것이며, 그분의 약속을 성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는 행위다. 기도하는 크리스천출처 기독일보(christiandaily.co.kr) (9) 죽음을 받아들이라. 죽어가는 자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의 기술’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중세 후기의 가르침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중세 후기 ‘죽음의 기술’과 비교해 볼 때 루터의 ‘죽음의 기술’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다. 죽어가는 자를 괴롭히는 죽음과 죄와 지옥이라는 해로운 이미지들에는 단지 한 가지 치료법이 있을 뿐이다. 그 치료법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를 위해 순전한 생명이며 은혜이며 선택된 분이신 그리스도가 그것들을 일소한다. (2)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중세 ‘죽음의 기술’은 구원의 불확실성을 보이지만, 루터는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루터는 회개의 감정이나 참회의 행위로 양심의 괴로움을 진정시키는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담대히 믿는 믿음을 중시한다. (3) 죽어가는 사람을 괴롭히는 유혹과 시련을 진지하게 다룬다. 중세 후기 ‘죽음의 기술’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고통을 끼치는 시련을 언급하기는 한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시련과 유혹을 중심 문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반면에 루터는 사탄을 약해진 정신과 상상에 침투해 해로운 이미지를 불어넣음으로써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적대자로 본다. 여기서 죽어가는 자를 공격하는 해로운 이미지들은 죽음으로부터의 불순종적인 도피, 용서에 대한 의심, 선택받지 못했다는 의혹 등이다. 루터는 이런 내면적 시련을 처음 발견한 인물은 아니지만, 기존의 목회 안내서보다 실존적 차원에서 더 심오하게 이 문제들을 다룬다. (4) 성찬을 중시한다. 중세 후기 ‘죽음의 기술’에서처럼 루터의 ‘죽음의 기술’도 성찬을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성찬이 무엇을 제공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중세 후기의 입장과 확연히 다르다. 루터는 죽어가는 자에게 믿음을 가지고 성찬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선물―을 받으라고 가르친다. 죽어가는 사람이 행위-의의 관점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의 문제를 놓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는 약속과 은혜와 그것을 분명히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믿음이다. (5) 성인들의 후원을 강조한다. 중세 후기 ‘죽음의 기술’처럼 루터 또한 죽어가는 자와 성인들의 관계를 중시한다. 하지만 중세 후기 ‘죽음의 기술’에 의하면 죽어가는 자는 성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해 중재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특히 곧 심판자로 만나게 될 성자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구한다. 반면에 루터의 경우에는 성인들이 죽어가는 자를 향해 있고, 그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한다. 이미 죽음을 통과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를 나누고 있는 성인들은 아직 죽음의 시련을 겪고 있는 이를 후원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죽어가는 자가 홀로 버려진 채 죽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면서 공동체적 위로를 제공하고 응원한다. (6) 연옥을 거부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참회 제도와 관련해 지옥과 연옥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연옥에 머무는 영혼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나타나 연옥에서의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성지순례와 면벌부 등을 통해 죽은 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세의 이런 행위들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간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간에 형성된 관계를 보여준다. 반면에 루터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죽음의 기술’에서 만큼 지옥 자체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옥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