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죽음 ⑤죽음을 알고 준비하자 V. 나가며 루터의 죽음관은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과는 확실히 다르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죽음의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의 핵심적 개혁 사상을 가지고 풀어낸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루터는 이 개혁 사상에 기초해 중세 구원론과 종교적 관행에 불가결한 요소였던 연옥 사상을 거부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관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관련해 두 차원의 죽음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 그리고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자연인의 생물학적 죽음이다. 전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의 형태와 그 이후 누리게 될 부활과 영생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는 만큼 루터의 죽음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이 두 차원의 죽음은 두 차원의 부활과 연결된다. 루터는 죽음 이후 불멸하는 영혼이 즉각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옮겨진다는 중세 후기 교리를 버렸다. 그 대신 기본적으로 부활 때까지 죽음은 잠과 같다고 설명했다. 잠으로서의 이 죽음은 첫 번째 창조 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두 번째 창조를 위해 거쳐 가는 중간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코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죽음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위해 꼭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죄와 죽음과 악과의 싸움에 대한 최후 승리다. 죽음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히에로니무스(348-420)와 그의 해골이다. 죽음 앞에서 항상 겸허했던 히에로니무스와 그의 해골 그림은 의료기술의 발전과 함께 죽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복할 수 있다고 자고하는 현대인에게 여러 면에서 도전을 던진다. 서재에 있는 히에로니무스출처 wikipedia(wikipedia.com) 해골을 만지며 묵상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묵상하는 성 프란치스코출처 wikipedia(wikipedia.com) 죽음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 역시 근본적으로 이와 일맥상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돈과 재산과 굉장한 명예와 권력을 자랑하고 이런 것들에 자부심을 지닌다. 하지만 루터는 이런 것들로 죽음을 막아내거나 피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묻는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을 때 곡식 한 톨이나 물 한 방울이라도 가지고 간 적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죽을 때 사람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놓아야만 하고 맨몸과 빈손으로 무덤에 들어가야만 한다. 게다가 심지어 작은 벌레조차 시체 전체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릴 수 있을 만큼 어떤 면에서 인간은 철저히 허무한 존재다. 따라서 루터는 죽음이 다가올 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덧없는 소유물을 영원히 누릴 것처럼 의존하고 자랑하며 사는 인생의 헛됨을 부각한다. 동시에 루터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절망 가운에 사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도록 강권한다.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오히려 잠을 자고 깨어난 후에 경험하게 될 놀라운 기쁨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은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에 맞이하게 될 최후의 승리로서의 영생과 천국의 행복을 소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소망의 대상이다. 한국 개신교에는 죽음관과 ‘죽음의 기술’이 아직 잘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김경재의 “한국 그리스도인의 죽음 이해”가 한국 그리스도인의 죽음관에 대해 조금 알려준다. 김경재는 아쉽게나마 그가 지도한 두 명의 목회학 박사논문에 첨부된 설문조사 결과를 사용해 한국 그리스도인의 죽음 이해를 제시한다. 몇 가지 결과를 보면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이후 “전통적인 무교적 사후 지 옥관이나, 유교 특히 신유학의 이기(理氣) 이원론적 사생관이나 불교적 윤회설을 벗어나서 새로운 사생관을 형성하였다.” 이 새로운 사생관은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경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천국과 지옥의 존재 등에 대해 거의 70% 이상이 긍정적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사후 생명에 대해서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으나 그 존재 방식에 관해서는 부활까지 잠을 잔다는 생각과 낙원에서 영생한다는 생각 간의 갈등을 보였다. 사후 영혼의 중간상태, 부활체의 상태 등과 관련해 통일된 이해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한국 개신교의 죽음관과 ‘죽음의 기술’ 정립을 위해 루터의 죽음관과 죽음의 기술에 관한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몇 가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확신과 소망을 분명히 갖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죽음으로부터 도망하고자 발버둥질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2) 죽음 이후의 심판과 관련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꼭 붙들게 해주어야 한다.(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비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 의미하는 바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확신하게 해주어야 한다.(4) 죽어가는 상황에서 떠오르는 온갖 부정적이고 유해한 생각들을 생명과 은혜와 영생을 선물로 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물리치게 해주어야 한다.(5)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을 확신하게 해주어야 한다.(6)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고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지하게 해주어야 한다.(7) 죽기 전에 세상일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8) 죽기 전에 불화하게 된 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9) 그리스도인은 사후에 부활하며, 이 부활은 완전한 소멸도 윤회설도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된다는 영혼불멸론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은 인간의 죽음과 관련해 허무론 이나 불가지론에 반대하는 것임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10)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물론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고, 이미 죽은 자들을 포함해 성인들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결코 홀로 버려져 있지 않음을 확신하게 해주어야 한다.(11) 죽음과 관련해 점을 본다거나, 죽은 혼령과 대화를 시도한다거나, 미신적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알려주는 성경 말씀을 꼭 붙들고 성찬에 참여하게 해주어야 한다.(12)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13) 무엇보다도 존엄한 죽음의 문제는 존엄한 삶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게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