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기독교 역사③: ‘죽음’과 기독교 역사

세 번째 에피소드: 로마제국의 기독교 (2) “전능하신 주 하나님, … 주님께서 저를 이러한 순간에 참예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을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리캅 (2세기 순교자) 1. 로마제국의 종교 유화정책 로마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이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며 상당 기간 일체성을 유지한 여러 가지 배경에는 제국의 유화정책이 있었다. 이 유화정책은 종교에서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각 민족의 전통 종교를 보장해 주는 방식이었다. 이 정책 덕분에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유대교의 오랜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역시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자긍심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우선 복음서 기록에 나타난 대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자유로운 종교활동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은 식민정부의 대리자인 분봉왕이나 로마제국의 총독과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의 결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예수의 처형 과정에서 시사되고 있다.1) 한 편 유대인들의 종교적 거점이었던 성전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던 AD 70년까지는 유대인들이 자유로이 출입하고, 그들의 종교 전통을 자유롭게 지켰던 예배 공간이었다. 성전은 교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 역시 성전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에서 전통 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존중과 종교의 순기능에 의지하려는 제국의 통치전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은 유대교 전통의 제사와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을 표현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의 직무에 관해 소개하라든가,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한 후 사십일이 되어 구약에 나타난 (레위기12:2-6; 5:11)대로 ‘산모의 정결’ 예식을 성전에서 드렸고, 또 할례 시킨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드리는 예식(출애굽 13:2)을 함께 드렸던 사실이 기록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누가복음 1:22-24) (그림-안토니오 시세리Antonio Ciseri,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by Antonio Ciseri, 1880년) 2. 새로운 종교 ‘기독교’와 로마제국 로마제국이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을 핍박하게 된 것은 한 마디로, ‘앗 이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구나’라는 인지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예수를 처형하였던 빌라도 역시 예수에게서 특별한 모습을 보았지만, 그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고 보지는 않았다. 유대교에는 공식적으로 바리새파, 사두개파가 존재했고 일부 유대인들은 열심파(Zealots)에 속하여 있었다. 로마 정부로서는 기독교를 이러한 유대교 분파 중 하나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사실 예수나 그의 제자들은 유대인 출신으로 유대교와 같이 한 하나님을 믿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인용했다. 예수는 비록 로마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이 처형은 유대인들의 고소와 고발, 그리고 처형에 대한 비상식적이고 적극적인 요구 외에는 제국이 그를 처벌해야 할 뚜렷한 범죄사실에 근거가 없었다. 즉 한 종교 안에서 특정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사형을 허용했을 가능성은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청원 내용은 예수가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제시했고 불행히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으니 사회불안, 즉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요소라고 주장했다. 요한복음이 증언하듯 예수를 처형하는데 혈안이 된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스스로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 즉 로마의 황제밖에 없다며 충성맹세를 하기에 이른다. 하나님만을 왕으로 믿어야 할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의 비신앙적인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요한복음 20:12, 15 -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강박적 행태는 식민지역의 평화 유지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로마 정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야욕을 채우고자 한데서 나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욕망마저도 구약의 예언을 이루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한 도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림-시몽 부에Simon Vouet, <십자가 처형> The Crucifixion, 1622년) 핍박과 기독교인들의 죽음 앞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믿었던 기독교를 핍박하게 된 로마제국의 결정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독립적인 종교라는 인식에서 근거했다고 했다. 로마제국에 이 발견은 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제국 전역의 전통 종교들은 합법적 종교 religio licita인데 반해 새로운 종교는 불법종교 religio illicita로 규정 지워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근거한 일정한 태도와 생활양식은 사회적으로 부적응자, 혹은 반사회적/반인륜적 태도를 가진 자들로 보였다. 그들은 그리 호전적이거나 대놓고 반역적이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평화주의자 pacifists로서 징병에 거부하기도 하였다.2) 잦은 전쟁을 이어가며 제국의 영토 확장과 유지에 힘썼던 로마제국에게 이러한 태도는 절대 달갑지 않았고 잠재적으로 사회 불안의 요소로 간주하였다. 사회생활에서도 기독교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였다. 원형극장에서 진행되는 경기나 공연은 로마제 국민들을 하나로 연대하게 해주는 사회적 요소가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하였고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잔인성과 선정성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기독교인들이 경기장 혹은 극장에서 일어나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로 이러한 행사는 로마제국의 다신종교 예식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신종교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흥미롭게도 무신론자로 취급되었으며. 신 중의 신이요 온전히 유일한 신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오히려 충분하게 신을 믿지 않는 이들로 비난받게 된 셈이다. (그림-장 롬Jean-Léon Gérôme,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1883년) 그들의 종교 모임은 어떠한가? 서로를 향하여 형제요 자매로 부르는 이 친밀한 모임은 간혹 근친상간으로 오해받기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기리는 성만찬의 상용구, “이는 내 살이요, 피요”는 기독교인들이 인육을 즐기고 피를 나누는 식인 사교 집단이라는 오해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식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명백히 오해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신흥종교요, 불법 종교였던 기독교는 법적 지위에서나 사회적 시선에서나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음은 분명했다. 기독교 역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기독교 핍박은 크게 두 시기를 거친다. 첫 번째 시기는 국지적 핍박의 시기로 1~2세기에 걸쳐 일어난 핍박이다. 두 번째 시기는 3~4세기에 일어난 전면적 핍박의 시기이다. 먼저 1~2세기의 핍박은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A.D. 41-52; 사도행전 18장 2절과 11장 28절에 ‘클라우디오’로 표기됨)때부터 시작된다. 사실 이 사건은 기독교인 핍박이라기보다 유대인 핍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기독교인 유대인과 관련하여 유발된 가능성이 크다. 내용인즉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인물로 인해 발생한 소요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기에 이른 사건이다. 그런데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크리스투스 (Christus)일 가능성이 높고, 이는 유대인 중 기독교 개종자와 유대교인 사이의 갈등이 소요로까지 번지면서 클라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추방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사도행전 18:1에 의하면 이 추방령에 의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오게 되었고, 거기서 바울을 만나 그들의 사역을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부부를 비롯하여 로마에는 이미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클라우디우스와는 달리 네로황제(Nero, A.D. 54-68)는 정확하게 기독교인들을 겨냥하여 핍박을 자행했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재혼한 어머니 덕분에 황제의 양자가 되었고, 나이 17세쯤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장성하면서 그는 어머니의 권력을 견제하느라 어머니를 살해했고 정부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나름 예술가를 자처했던 그는 원형극장을 많이 지었고 그곳에서 다양한 경기와 공연을 하게 함으로 하층계급의 환심을 샀다는 해석도 있다. 네로황제는 성격적으로 강박적이고 충동적이었다고 당대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주장했다. 또한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계기가 된 로마시의 대화재 사건(64년)은 사실상 네로황제의 광적인 방화였다는 주장이 있다. 화재가 발생하자 로마인들의 네로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커졌고, 이를 무마하고 해소하기 위한 한 방편이 기독교인들을 방화범, 내지는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림-헨리크 시에미라츠Henryk Siemiradzki, <네로의 횃불> Siemiradski Fackeln, 1876년) 그리하여 다수의 기독교인이 원형경기장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방식의 잔인함에 대하여서는 타키투스(Tacitus, 고대 로마의 역사가)의 기록으로 대신한다. … 먼저 체포되어 [기독교인임을] 자백한 자들이, 그리고 그들의 자백에 근거하여 체포한 허다한 무리가 방화죄가 아닌 인류에게 혐오감을 준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의 처형식은 스포츠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어떤 자들에게는 짐승 가죽을 입혀 개들에게 찢겨 죽게 했다. 또 어떤 자들은 십자가에 달거나 불태워 죽였고, 날이 캄캄해졌을 때 횃불로 사용된 자들도 있었다. 네로는 자기 정원을 공연장으로 꾸며 서커스를 제공했고 직접 전사 복장을 하고서 잡아다 놓은 기독교인들 사이로 전차를 마구 몰고 다니다가 그들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만두었다. 이들은 비록 중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긴 했으나, 사실상 공중의 선을 위해 고통을 당한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통을 당했다.3) 타키투스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기독교인들이 중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처형하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도 네로의 통치 아래 순교했다. 베드로의 회심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웅적 삶을 다루는 영화 ‘쿠오바디스’는 네로에 대하여, 또한 그의 기독교 박해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원형경기장에 끌려 나온 기독교인들이 찬송을 부르고, 또 화형당하면서도 찬송을 이어가는 모습을 혐오하던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비인간적(nonhuman)인 존재라고 비아냥거리던 모습, 또 처형식 끝난 후 경기장으로 내려가 시신을 확인하며 그들이 웃으며 죽었다고 못마땅해하던 모습을 꼽는다. 만약 네로가 기독교인들이 억울하게 죽지만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담대한 자세로 죽음을 대하였던 이유를 알고자 했다면, 나름의 구도의 과정을 거쳤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신명기에 “...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라고했다. 네로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권력은 물론 생명조차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물론 로마제국의 권좌는 끊임없는 전쟁과 권력암투의 각축장이었기에 권력을 잃은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이 그리 놀랍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죽음을 맞아 평소 애송했던 것으로 보이는 베르길리우스(Virgil, 70-19 BC) 시인의 구절처럼 “과연 죽는다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라고 말하며 진정 초연했을지, 혹은 그의 손에 의해 경기장의 이슬로 사라진 기독교인들처럼 담대했을지는 의문이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인을 향한 핍박은 2세기에 들어오면서 나름의 원칙이 세워지는 대전기를 맞는다. 그 시작은 소아시아 비두니아(지금의 튀르키예 서북지역) 지방의 로마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의 한 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111년부터 113년 사이에 소 플리니우스 총독은 당시 황제 트라야누스(Trajan, 98-117)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독교인 처벌의 기준에 대하여 조언을 요청했다. 이 질문에 대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대답은 트라야누스의 칙령이 되어 이후 기독교인 박해의 기준이 되었다. <플라니우스의 편지 모음집> PlinyYounger panegyricus, 1750년 내용인즉, 그리스도인들을 일부러 색출하지는 말고 사회적인 문제로 고소나 고발이 있으면 그들을 다루라는 것이다. 익명의 고발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부인할 기회를 주고 부인하지 않으면 처형하였다. 부인할 기회를 주는 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통용되었던 박해/핍박의 근거요, 한 형식이다. 사실 박해의 이유는 근절에 목표가 있기 때문에 처형만이 답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도미티안 황제(Domitian,81-96) 치하에 같은 기준과 비슷한 수준의 박해가 이어졌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에 이어 그들의 뒤를 이은 소위 속사도들의 순교가 2세기 교회의 고통과 능력이 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인 107년경에 있었던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의 순교와 안토니우스 황제(AntoninusPius, 138-161) 치하에서 일어난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 (Polycarp of Smyrna)의 순교는 감독이라는 그들의 지위와 영웅적인 죽음으로 인해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이그나티우스 감독은 일곱 개의 서신을 남겼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중 서머나에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신자들이 자신을 구출하려는 작전을 진행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만류하는 서신이었다. 그는 “당신들의 친절을 두려워하는데 그 친절이 오히려 나를 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잔인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지만 그 죽음을 두려워하여 영광스러운 순교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그의 강인한 의지가 보인다. 그가 서머나에서 만났던 폴리캅 감독은 이그나티우스를 이어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155년에 구속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일화는 그를 가장 감동적인 순교자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의 연로함을 걱정한 집정관은 그를 살려줄 명분을 찾았고 만약 이 연로한 감독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했다면, 그는 기꺼이 살려주고자 그를 권면하고 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절한? 제안은 노감독의 신앙적 결단을 결코 꺽지 못했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진정성 있는 믿음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 믿음은 다음의 말에서 확인된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으나 그분이 나에게 악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연이은 배교의 회유에도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요”라고 외침으로 신앙을 지켰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을 두려워하며 이 땅에서의 화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지금도 서머나 교회를 방문하면 그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그린 이콘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일곱 교회 중 여섯 교회는 그 흔적만 남기고 있지만, 서머나 교회가 방문할 수 있는 실제 교회로 존재하는 이유가 폴리캅 감독의 순교에 있을 것이다. <폴리캅의 순교> Martyrdom of Polycarp 로마제국의 오현제, 즉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중 한 명이면서, 철학자요,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61-180)는 그 명성과 달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순교자 유스티노(Justin Martyr,110-165)와 과부 펠리치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이 순교하였다. 혹자는 어떻게 고상한 철학자였던 그가 단지 종교 문제로 잔인한 죽음을 허용하였는가 하며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가 당대의 법과 사회의 안녕질서를 최우선시했던 유능한 황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1) 누가복음 23:12에 의하면 분봉왕인 헤롯과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된다.2) 초기 기독교인들의 다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이나 전쟁에 관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검투사의 경기를 관람하거나, 사형과 관련한 법집행관이 되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믿어 거부하기도 하였다.3) Tacitus, Annals XV, 44, 롤란드 베인턴 저 이길상 옮김, 『세계교회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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