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기독교 역사④: ‘죽음’과 기독교 역사

네 번째 에피소드: 로마제국의 기독교 (3) “이 병(vase)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듯이 저도 한 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면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수 없습니다.” 페르페투아 (3세기 초 순교자) 3~4세기의 핍박 1~2세기의 박해가 비조직적이고 국지적이었다면, 3~4세기의 박해는 제국 전체로 확장되어 조직적인 박해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한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일치와 옛 영광의 회복, 그리고 황제의 권력 강화를 위하여 종교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Septimius Severus, 145-211) 는 이러한 변화의 기원을 마련하였다. 그는 193년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기존 종교에 태양신을 더하여 숭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대인들에게 끊임없이 다시 떠오르는 태양은 불패의 상징1)이었으나 근동과 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브리튼과 다뉴브강 서쪽 유럽, 즉 로마제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태양은 이미 신으로 숭배됐다. <솔 인빅투스> Sol Invictus, 1899년 그러므로 이 칙령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일신교를 믿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었다. 황제는 더 이상의 이탈자를 막기 위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하였다. 세베루스는 유능한 황제였다. 그의 개선문이 지금도 로마 포럼(Roman Forum)의 북서쪽 끝을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2) 비록 조각의 여러 부분이 손상되었지만, 지금도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황제의 성취와 권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구속되고 처형에 이른 사람 중에 페르페투아(Perpetua)와 4명의 예비신자(학습교인)가 있었다. 페르페투아는 21세 정도의 젊은 엄마로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구속과 처형 직전의 상황을 글로 남겼고 거기에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 약 160-220)의 서문과 처형 당일 즉 순교의 상황이 글의 마지막에 더해져 『페르페투아의 순교일기』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3) 이 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 글은 현존하는 여성 기독교인의 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글이다. 근대 이전에 여성 기독교인이 쓴 글은 매우 적다. 초대교회의 경우는 더구나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 글은 3세기 순교자들의 구속 상황과 관련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신학적으로 정통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 살고 있었던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즉 신학 내용의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여성 순교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가정과 육아라는 요소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순교 일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순교 일기에는 다섯 명의 예비신자 혹은 학습 교인이 등장한다. 초대교회는 회심을 엄격하게 다루어 세례까지의 과정이 2~3년에 시간을 가진다. 핍박의 상황에서 쉽게 회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이는 물론이거니와 기존 신앙공동체에도 결코 안전하지 않은 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을 가진다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한 심각성을 충분히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페르페투아 순교 perpetua martyrdom, AD207년) 이들은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으며 감옥에서 세례를 받은 이후에 그들의 처형일이 정해졌다. 이 중 여성 두 사람은 페르페투아와 그의 몸종으로 보이는 펠리치타스이다. 페르페투아는 아직 젓을 떼지 못한 어린 아들이 있었고 펠리치타스는 임신 상태였다.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적어도 두 차례, 구치소와 감옥의 면회실을 찾아왔고, 딸에게 어린 아들과 백발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예수를 부인하고 살아남으라고 처절하게 호소한다. 페르페투아는 마치 한 번 병(vase)이 된 것은 영원히 병이듯이 나도 한 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으면 영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청을 거절한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한 그의 말은 울림이 크다. 이 글에는 아버지의 노여움과 안타까움이 매우 적나라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뿐인가! 집정관도 그 아버지의 안타까움에 동조한다. 감옥으로 옮겨지면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려가고 그녀는 감옥에 함께 갇힌 동료들의 리더로서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기도 중에 받은 환상을 나누기도 한다. 한편 임신 중인 펠리치타스는 정해진 처형일 전에 출산할 수 없다는 것을 계산하고 하나님께 조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하는 동료들과 함께 처형되지 않는다면, 일반 죄수들과 함께 처형될 수 있고 그 경우 자신의 죽음이 종교적 순교가 아니라 다른 범죄자의 죽음과 같이 취급될 수 있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고, 그는 조산했다. 감옥에서의 출산은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울부짖음에 간수도 안타까웠나 보다! 여자들이 다 하는 출산의 고통을 당신이 견디기 힘들어하면서, 그날(처형일)의 고통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펠리치타스는 그날에는 주께서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해 주실 것이라고 대답하여 간수를 감동하게 했다. 해산하자마자 갓난아기를 자신의 자매에게 맡긴 그녀는 이제 순교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감사했다. 그리하여 순교 당일이 되었다. 남자들이 먼저 맹수에게 내준 바 되었고, 여자 두 명의 차례가 되었다. 집정관은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고자 황소를 준비하고 여자들은 벌거벗겨진 채로 경기장에 내몰려졌다. 다행히 잔인한 관객들조차도 이 젊은 여성들, 더구나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벗겨진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관객들의 야유가 집정관들을 향하자 재빨리 그들을 불러들여 옷을 입히고 다시 내보냈다. 페르페투아는 황소에게 이리저리 던져짐을 당하면서도 황소와 잠시 떨어지게 되면 자신의 옷매무새와 머리를 다듬는 모습을 보였다고 기록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것이 페르페투아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될 자신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서 한 행동이라고 썼다. 가히 영웅적인 페르페투아의 죽음은 3세기 초 순교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페르페투아의 순교 일기가 이후 계속 읽히고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이야기가 되풀이된 것은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이다. (그림-아버지를 위로하는 페르페투아 Perpetua Comforting her Father by Antonio Ridolfi, 1857년) 테르툴리아누스의 서문에 있는 말처럼 당대와 후대에 신앙의 교훈을 주기에 충분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처음 대하였을 때가 미국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조교를 할 때였다. 한국에서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글이었다. 세계교회사 수업 중 소그룹 토론의 과제였던 이 글은 많은 학생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글이기도 했다. 당시 어린 두 아이의 엄마였던 내게 페르페투아나 펠리치타스의 순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단이었고, 그들의 신앙은 심히 도전적이었다. 혹자에게는 종교적 광신 행위로까지 오해받을 수 있는 결정이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의 가족과 육아 포기는 자신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 자신의 아이를 돌보아 줄 가족, 혹은 신앙공동체에 대한 확신이 아주 컸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강한 애착, 모성의 역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 이 두 여성의 순교는 사뭇 충격적이지만, 순교에 관한 한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하다. 생각해 보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믿음이 아니다. 속으로는 믿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겉으로는 믿는다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적을 기쁘게 할 뿐이지 않을까? 세베루스 황제 이후 기독교 박해의 새 이정표를 세운 황제는 데키우스 황제(Decius, 201-251)이다. 데키우스를 가리켜 전통적인 로마인이라고도 한다. 그는 로마제국이 옛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보았다. 권력다툼으로 군인 출신 황제들의 임기는 짧아지고 경제는 좋지 않았다. 그는 로마제국의 약화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옛 영화를 찾기 위해 제국 전체의 백성들은 제국의 종교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종교 사회적으로 예리한 관찰을 했다. 제국의 통합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는 기독교를 핍박하고 순교자를 만들어 주는 것은 그들을 더욱 번성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말한바,’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49년에 즉위한 그는 배교자를 양산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의 정책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즉, “남자든 여자든,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든 제국의 모든 시민은 신들에게 공적 제사를 지냄으로써 충성을 입증”4) 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의 관리는 이것을 확인한 후에 증명서를 발급해 주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적어도 세 가지였다. 이러한 정책에 굴복하지 않고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지내지 않아 처벌 내지는 순교를 감당하는 경우, 제사를 지내고 증서를 받음으로 배교 행위를 하는 경우,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지역관리를 설득하여(돈을 지급한다든가) 증서를 받아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경우이다. 이 기간에는 순교자보다는 고백자(confessor)를 더 많이 배출했다. 여기서 ‘고백자’는 순교하지 않았지만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곤잘레스는 이 핍박의 “기간은 짧았으나 교회에는 모진 시련”이었다고 정리한다.5) 증명서는 제국 곳곳에서 발굴되었고, 이 기간에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오리게네스가 순교하였다. 배교자와 고백자의 공존은 종교공동체의 갈등을 초래했다. 종교를 배반한 이들을 공동체로 다시 받아 줄 것인가? 받아 준다면 어떤 절차를 거치게 할 것인가? 데키우스의 박해가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박해였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가장 심한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였다. 이 박해가 마지막 박해는 아니었지만 밀라노 칙령 (313) 직전에 일어난 박해였다.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재임 기간 242/245–305)황제는 제국을 재정비하면서 기독교 박멸을 시도한 황제이다. 303년에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고, 성직자들을 체포하도록 명하며, 기독교인 공직자들을 해임하고, 기독교 건물들과 서적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그는 제국은 나누어 2명 혹은 4명까지의 황제와 왕들이 다스리게 했다. 은퇴 후 양배추를 기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11년 그의 후계자 중 하나였던 갈레리우스가 죽은 직후 기독교 근절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기독교 핍박과 순교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Istanbul Museo archeol Diocleziano, 305년 로마제국의 기독교 핍박은 자명한 법적 근거와 기독교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순교는 종교적 확신에 의한 거룩한 죽음이다. 이 죽음은 내가 원한다고 택할 수 있는 죽음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 영광의 관을 씌워주는 것이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믿는 것도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초대교회가 경원시하고 죄악시했던 자살과는 차원이 다른 죽음이다. 부활을 온전히 믿고 이 세상의 영광을 탐하지 않은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라 하겠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린도전서 15:19, 32 -1) 그는 태양신을 sol Invictus라 명명하였다. 그 뜻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이다.2) 로마로 가는 일반여행이든 성지순례이든 대부분 로마 포럼(Roman Forum)을 들린다. 이때 이 개선문은 굳이 언급되지 않지만, 미리 확인하고 간다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포럼 북동쪽 바깥 윗부분에 위치한 베드로 감옥(Mamertine Prison Rome) 앞 광장에 가면 이 개선문의 전체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3) 현재는 절판상태이지만 이 글은 서원모 외 3인, 편역, 『여성과 초대기독교』,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2)에 필자의 번역으로 수록되어 있다.4) 롤란드 베인턴, 이길상 옮김, [세계교회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89.5) 후스토 L. 곤잘레스, 엄성옥 역, 『초대교회사』, (서울:은성출판사, 2012),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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