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에피소드: 로마제국의 기독교 (4)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5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 1.로마제국의 죽음 이해와 기독교인의 죽음 매일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에 들어가는 우리는 모두 자기 죽음을 향해 더 가까이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잘 죽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이 보편적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험된 것이기에 인류는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 질문하고 답해 왔다.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여전히 죽음을 연구하는 이유는 누구도 죽음을 연습할 수 없고, 연습 없이 무차별적으로 닥쳐오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먼저 죽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둔다. 장례식은 결혼식보다 더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와 함께 내 죽음을 준비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죽음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신비로운 것이 죽음 이후이다. 죽음이 자명한 것과는 달리,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한 인류의 경험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지식이나 존재 여부에 대해 확신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현세에 대한 집착은 더 크다. 아는 것에 충실한 것일지 모른다. 내 죽음의 순간이 명예롭기를, 혹은 존엄하기를 기대하고, 또 자기 죽음이 이 세상(이후는 알 수 없으므로)에서라도 두고두고 기억되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종교를 막론하고 추모의 제의가 있다. 그것이 제사이든, 예배이든, 예불이든 말이다. 추모는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론 여기에 죽은 자가 부탁한 것을 포함해야 한다. 이 추모에는 고인에 대한 간절한 사랑, 가문/기관의 영향력을 확고히 함, 후손/후대를 위한 교화 등의 여러 의도가 중첩적으로 깔려있다. 2. 순교자들의 죽음 이해 고대기독교에서 또 그들의 사회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추모 되었을까? 먼저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자.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부르심, 혹은 선택하심으로 여겼다. 순교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다. 분명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처형을 택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자신의 선택인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그 영광의 자리로 부르시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못했으니 스스로 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그나티오스가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길에 자신을 구출하려고 한 성도들의 갸륵한 정성을 거부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순교는 흔히 ‘제2의 세례’, 혹은 ‘피의 세례’로 알려졌다. 물세례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들이 이제 피의 세례로써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또한 순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죽음은 이미 믿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표본이었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신기함과 기이함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기이함은 비난거리로, 혹은 칭찬거리로, 드물게는 전도의 기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의 죽음은 이런저런 이유로 늘 우리 곁에 있게 되는 죽음이 되었다. (그림-카라바지오Caravaggio, <성 베드로의 순교>St. Peter's martyrdom, 1600년) “모든 고백자[confessors]와 순교자는 무엇보다도 선교사였다. 그들은 신자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증거와 죽음은 새로운 신자들을 낳았다. 법적으로 집행된 순교자들의 처형은 많은 이의 마음을 흔들었고 또한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질문하게 했다. 과연 누가 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인가? 죽은 이들인가, 이들을 죽인 자들인가? 당당히 죽어 간 이 그리스도인들의 진정성과 주저 없는 태도에 사람들은 이들이 비난받을 사람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이들이 말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바로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될 수 없었다.1) 곱씹어 볼수록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순교는 참으로 위대했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이 경험하기엔 너무나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순교자들은 기꺼이 그 죽음을 사모하였고, 믿는 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열광적으로 되새기고 재구성하는 것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였다. 로마제국의 종교가 쇠락해 가고 있을 때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는 종교적 논리에서뿐만 아니라,2)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특별한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순교는 그 특별함의 대표적인 예증 중의 하나였다.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그의 책 『기독교의 발흥』의 결론에서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가 실체화되어 사람과 조직에 나타나게 되면서 기독교는 짧은 시간 안에 로마제국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독특한 교리의 핵심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자비이다. 법과 이성을 중시했던 로마의 철학자들에게 연민과 자비는 생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드니 스타크의 책 『기독교의 발흥』 동정이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흠과 같은 것이고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자들에게나 용납될 수 있는 가치였다. 동정은 무지에 근거한 충동적 반응으로 이해되었기에 플라톤 같은 이도 이상 국가가 되려면 거지들은 국경 쪽으로 내다 버리라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비를 핵심 덕목의 하나로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도 가르쳤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3) 앞서 보았던 몇 분의 순교자들의 죽음 역시 스타크 교수의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그들은 순교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자비에 주목한다. 그들이 영웅적으로 죽을 수 있었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고 그 복음은 성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순종이다. 로마인들에게 이런 신의 사랑은 신이 해야 할 종류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수의 로마인은 그 신을 믿지 않았지만, 바로 같은 이유로 다른 이들은 그 신을 믿게 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따라야 할 사람들이다. 인류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던 인간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죽음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그림-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루벤스 사도 바울>Rubens apostel paulus grt, 1611년)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고 했다. 죽음의 실체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으로 정복하고 영생으로 나아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고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5:58)라는 말씀을 따라 더욱 열심히 사랑하는 자들이 되고자 하였다. 신약성경은 구약과 달리 노년에 대한, 혹은 노인에 관한 이야기가 제한적이다.4) 그러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적은 것은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죽음과 관련된 비유가 많다. 밀알의 비유, 자기 부인의 제자도, 창고를 채우는 부자의 죽음, 나인성 과부 아들의 죽음, 나사로의 죽음, 등등 죽음이 지속해 등장한다. 그뿐인가! 그는 활동의 전성기에도 자기 죽음을 여러 번 언급했고 33살 정도의 나이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로마 총독과 유대교 지도자들, 그리고 다수의 유대인 무리에 의해 공적으로 결정되고 거행되었다. 부활로 그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재림을 약속한 후 승천하셨다. 이후 그의 제자들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의 죽음의 서사를 신학화하였다. 곧 그의 죽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세례는 죄에 죽고 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이 되었다. 한 번 죽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지만 매일의 삶에서 죽고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죽음은 노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이 그랬고 페르페투아와 같은 젊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그랬다. 로마제국의 사람들은 죽음을 오염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례는 죽은 그 당일에 치렀다. 이러한 관습은 서양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장례의 과정은 시신을 씻기고, 기름 바르고, 옷을 입히고, 꽃으로 치장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시신을 화장할 경우에도 몸의 한 부분을 묻었다. 화장은 기원전 400년부터 1세기 동안 보편화되었지만, 헬라인들은 매장과 화장을 함께 사용하였다. Busto de Adriano 하드리안 흉상 하드리안 황제부터 3세기 중엽까지는 매장이 증가했다. 매장이 증가하게 되는 데에는 종교적 이유나 사후세계를 염두에 둔 변화라기보다는 시대 풍조에 따른 변화로 간주한다. 매장이든 화장의 경우이든 무덤에 음식을 넣는 구멍을 만들었고, 매장의 경우는 망자의 사후가 편안하게 해 준다고 믿는 물건들을 넣었다. 죽은 자를 기억하고 그 영혼을 달래는 일종의 제의가 망자의 생일을 중심으로 마련되기도 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죽은 날을 기념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죽은 날은 영생으로는 탄생이었기 때문이다.5) 트라야누스 황제 때부터 석관(sarcophagi)이 사용되었다.6) 석관, sacorphagus 의 뜻은 살을 먹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살을 분해한다고 믿었던 석회암 (Limestone)이 석관의 재료로 주로 사용됐으나 다른 돌이 사용되기도 했다. 바티칸 박물관의 한 방에 나란히 모셔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Helena 329년 사망)와 황제의 딸 콘스탄티나 (Constantina 354년 사망)의 석관들이 그 경우인데, 이 석관들은 규산염이 풍부한 곳에서 만들어진 반암(porphyry)으로 만들어졌다. 대리석처럼 보이는 이 석관들은 그 크기뿐만 아니라 붉은 자줏빛의 돌과 그 위에 새겨진 조각의 아름다움은 가히 압도적이다. 석관들의 겉면에는 다양한 주제의 조각(부조)들로 장식되어 있다. 십자가나 부활 같은 기독교 상징이 조각되거나, 개인의 일상의 삶, 낙원이나 사랑, 영웅적 성취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그림-바실리 사조노프Vasily Sazonov,<성십자가를 바치는 황후 헬레나>Helena present the Holy Cross, 1870년) 부자들이나 권세가들의 석관은 마우솔레움(Mausoleum)이라고 하는 영묘에 모셔졌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헬레나 황후나 콘스탄티나 공주의 석관도 처음에는 영묘에 보관되었다가 후에 바티칸박물관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마우솔레움 중에서 정말 아름다운 것은 라벤나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이다 (Ravenna Mausoleum GallaPlacidia). 성 비탈레(St. Vitale) 성당 가까이에 있는 이 영묘는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겉모양은 T자 십자가 형태를 지닌 붉은 벽돌집으로 소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부로 들어가면 온전히 보존된 모자이크의 아름다움과 주제의 거룩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난 이 영묘에 있는 모자이크화의 절정을 천장화라고 본다. 푸른 빛 하늘과 금색 별의 영롱함은 말로도, 해상도 좋은 사진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 중 하나인 라벤나는 이태리 북동쪽에 있다. 한때 서로마제국의 수도 (408-476)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다. 이슬람의 침공을 받지 않았던 덕분에 곳곳에 최고의 보존상태를 보여주는 모자이크화를 품은 교회들과 세례당이 있다. 필자는 학생들을 데리고 두 번 이 아름다운 도시를 방문했었다. 지금도 그 도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베네치아 궁전 델 포폴로 광장, 라벤나 Palazzetto Veneziano Piazza del Popolo, Ravenna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로 통용되고 있지만 이 건물이 처음부터 영묘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교회의 부속 건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눠지는 모양이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발레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딸 갈라와 테오도시우스 1세 (379-395) 의 딸이다. 사람은 죽어서도 그의 신분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 시신이 묻히는 곳과 장례가 치러지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시신과 장례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많은 경우 수많은 사람과 함께 죄인으로 처형되었으니, 가족에게 그 시신이 가지 못했을 것이다. 공식적 장례는 허용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갈라 플라디아 영묘 천장화에 있는 빛나는 별들처럼,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의 무리로 서서 우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들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서 12:3 - "...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1-2 -1) Adolf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translated and edited by James Moffatt (New York: Harper Torchbooks, 1962), 367.2) 초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복음의 내포한 고유한 메시지의 힘으로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다는 분석은 19세기 이후 하르낙과 같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다.3)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How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a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 (HarperSanFrancisco, 1997), 212.4) 리차드 & 주디스 헤이스, “성경의 관점” 「그리스도 안에서 나이듦에 관하여」 (서울:두란노, 2021), 21.5) Everett Ferguson, Background of Early Christianity, 3rd Ed., (Grand Rapids: W. B. Eerdmans Publishing Co., 2003), 244f. 망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풍속은 기독교에서는 애찬, 혹은 성찬으로 대체되었다.6) 위의 책,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