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하루, 거룩한 일상 ⑧]병원에 가고 약을 챙길 때 바쁜 하루를 보내느라, 혹시 아침에 드셔야 할 약을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제시간에 먹어야 할 약을 깜박하고 먹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때로 이미 약을 먹은 줄도 모르고 더 먹어서 약통이 금세 비거나, 또는 이런저런 약을 먹다 보니 같은 약을 중복해서 먹는 경우도 있지요. 오늘 병원 예약이 있지는 않으셨나요? 요즘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장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몇 년 전에 예약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원에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주차장에서부터 복도, 진료실 앞까지 장사진을 이룹니다. 그런데 어렵게 만난 의사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짧으니, 이렇게 병원에서 홀딱 정신을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한순간 멍해지는 느낌입니다. 소소한 하루에서 거룩한 일상을 누리는 경험을 나누고 있는데,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병들었을 때 깨닫는 것들 병원에 가는 것만큼 부담스럽고 피곤한 일도 없습니다. 그래도 여기저기가 불편해서 의사를 찾아갔는데, 힘들게 만난 의사로부터 딱히 병이라고 할 것도 없다며,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고 마음 편하게 가지시라는 처방을 듣고 나면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속 시원한 대답을 못 들어서입니다. 사실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부터 해결해야 할 난관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별일도 아니었는데, 자가운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택시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합니다. 직장 생활로 바쁜 자녀를 부르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도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면서 일부 비용을 부담하면 병원에 동행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 아를 병원의 병실(1889) 출처 : 암 뢰머홀츠 미술관(스위스) 어렵게 병원에 왔지만, 여기저기 다니며 검사를 받고 진료를 보는 일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복도 의자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넋 놓고 앉아 있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이제 다 마치고 나면 진료비를 계산하고 처방전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복도에 서있는 키오스크 앞에서 여러 가지 숫자와 부호를 눌러야 합니다. 이 또한 넘어야 할 난관입니다. 어떻게 할지 몰라 순간 긴장하면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 눈치까지 보느라 마음이 조급해지면 버튼을 잘못 누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나마 옆에서 도와주는 봉사자들이 계셔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병원에 갈 일을 생각하면 의사로부터 혹시 들을지 모를 중병에 대한 선고보다도, 가고 오는 일부터 심란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본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아프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며 이런 말을 합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하다가, 병원에 가면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때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기도하던 때는 몸이 고통스럽고 불편했을 때입니다. 가난해진 마음에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으며 기도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왔다는 것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인간은 참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병이 들어서야 비로소 이런 것을 알게 되니 말이지요. 건강할 때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입니다.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건강에 대한 염려가 엄습할 때 한국 사람들만큼 의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환자도 없다고 합니다. 환자 스스로 여러 정보를 취합해 나름의 진단은 물론 처방을 내리고 의사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튜브 영상으로 의료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신의 판단이 앞서기 쉽습니다. 민간요법만 아니라, 최신 의학지식까지 섭렵하고 의사를 찾아온 환자를 앞에 두고서 잘못된 의학지식을 바로잡고 환자의 신뢰를 얻는 일은 의사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미국 암 전문병원 M. D. 앤더슨 병원의 종신교수인 김의신 박사는 한국인 암 환자가 병원에 오면 의사에게 꼭 하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이 치료법이 정말 제게 맞을까요?” 의사로서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얼마나 살지 정확히 알 수 없고, 현재로서는 이 치료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대답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사가 그런 것도 모르세요? 이 병원이 유명한 병원 맞아요?” 이렇게 터져 나오는 불만을 감당하기가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반면 자신이 만난 미국인 암 환자에게서는 조금 다른 반응을 경험했다면서, 그 차이점을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미국인 암 환자는 지금까지 복용한 약의 이름과 양을 정확히 알려주는데, 한국인 암 환자는 그런 정보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또한 병원에 입원해서 지내는 미국인 암 환자나 가족은 병실에서 우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문화적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신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치료는 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병원에서의 일상을 무던히 견디며 지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잘 유지하는데 관심을 보였습니다. 반면 한국인 암 환자는 암 진단을 받으면 병실에서 암과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자주 울었고, 그런 이유로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의 구역질도 한국인 암 환자에게서 더 자주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렘브란트 - 의식 없는 환자(1624-1625) 출처: 라이덴 컬렉션(뉴욕) 사람들마다 크든 작든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가족 중에 특정 질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분이 있는 경우에는 유전적 요인이 우려되어 조금만 아파도 큰 병을 염려하게 됩니다. 유해 물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필수품처럼 사용하던 화학물질이나 제품이 몸에 해로운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라는 경험도 합니다. 게다가 몸이 아프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이 전부가 아니지요. 당장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하니 우울해집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으니 답답해 괴롭습니다. 쉽게 일상이 무너집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대시며”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할머니와 손자가 병원에 다녀오는지, 손에 약봉지를 들고 지하철 타는 것을 보고는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라고 말하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할머니는 이런 질문에 나올법한 대답,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단다” 또는 “할머니는 다 알지”가 아니라,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고쳐주신 기록이 참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리느라, 병이 낫는다는 기대감마저 잃고 무력감에 빠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만난 나병(癩病, 한센병 또는 문둥병) 환자가 그랬습니다. 당시에는 적절한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제사장으로부터 나병이라는 판결을 받는 순간 율법을 따라 동네 밖으로 쫓겨났고,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서는 안 되고, 또 자신이 나병 환자임을 알리면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은 막아야 했습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질병입니다. 이런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나병 환자나 예수님이나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절박함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피하실 수 있었음에도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만지신 데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 질병을 죄와 연결 짓는 당시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을 깨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병들처럼 고칠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 환자를 사로잡고 있던 절망과 무기력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누구와도 가까이할 수 없어서 생긴 고립된 마음 문을 여시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처럼 무너진 마음을 세우시고, 상처 난 몸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미 인간이 겪는 육체의 취약함과 그로 인한 수치와 외로움을 아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으로 헤롯 왕이 수많은 아이들을 죽이는 위험 앞에 똑같이 노출되셨습니다. 세상에 계시며 신적인 능력을 행하실 때도 인간이 느끼는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을 느끼셨고, 슬픔의 고통에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벌거벗은 몸으로 못 박히는 수치와 피 흘려 죽기까지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할 아픔과 괴로움은 없습니다. 손을 내밀이 만지시며 고쳐 주시려는 그 사랑에서 예외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복원하는 시간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로운 순간은 불평스럽고 원망스러운 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귀한 몸을 제대로 돌봤는지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그러면서 몸이 아파서 괴롭고 병원에 가느라 불편을 겪던 주변 사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했는지도 들여다봅니다. 혹시 저 사람이 겪는 질병의 고통과 어려움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말이지요. 그리고 몸이 아파 괴로워하는 나에게 손을 내미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봅니다. 동시에 작은 소리로 숨죽여 신음하며 나의 위로를 손꼽아 기다리는 누군가의 음성도 살펴봅니다. 이웃을 향한 상실한 긍휼의 마음을 복원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 병원에 가고 약을 챙겨 먹을 때입니다.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며 복도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병원을 찾은 다른 사람들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때문에 정신을 홀딱 빼앗기고 또 긴 대기 시간에 지쳐있을 때, 시선을 내 안에서 밖으로 돌려보면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모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부터 휠체어를 타고 있는 노인까지, 가벼워 보이는 외상부터 침대에 누워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붕대를 감고 여러 개의 링거주사를 맞는 사람까지, 다양한 형편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 마음의 손을 뻗어 주변 사람의 아픈 상처를 쓰다듬으며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상상을 해보세요. 그들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이 고통 중에 괴로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병이 나아 일상을 회복하기를 축복하는 겁니다. 루크 필데스 - 의사(1891) 출처 : 테이트 모던(영국 런던) 이렇게 병든 중에도 할 수 있는 귀한 섬김이 있습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질병에 불안할 때, 또한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분주할 때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의 소소한 대기시간은 거룩한 일상이 되어 나를 새롭게 합니다. 병실에 있을 때 했던 찰스 스펄전 목사의 고백입니다. “나는 종종 병실에서 있었던 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본다. 나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고통의 침상에 있었을 때 은혜 가운데 가장 성장했음을 확신한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누가복음 7: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