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하루, 거룩한 일상 ⑨]일을 할 시간에 행복한 사람은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이란 직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직업으로 하는 일은 물론이고, 취미나 봉사로 하는 일과 혹은 정기적인 학습 활동 모두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직업이야 평생 가질 수 없으니, 하고 싶다고 다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텃밭 가꾸기나 교통 봉사, 평생교육, 등산 등 꾸준히 할 수 있는 활동은 신체와 정신 건강에 매우 유익합니다. 텃밭만 하더라도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열매를 수확하는 일의 즐거움과 보람이 있더라고요.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과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소소한 하루에서 거룩한 일상을 누리는 경험을 나누고 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전히 성숙해 가야 할 나이 과학 저널리스트 마르타 자라스카(Marta Zaraska)는 저서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Growing Young)에서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일본에서 노인들의 활발한 사회 활동을 관찰했습니다. 일본 곳곳에서 본 노인들은 도로 주변 공사 현장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주차관리를 하고, 박물관 앞 인도를 쓸고, 공원 장미의 가지를 쳐냈습니다. 노인 관련 일자리에서 꾸준하게 일하거나, 마을 사람과 함께 여러 모임에서 활동하고 봉사하며 삶의 의미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도 거리를 청소하는 일자리로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라스카는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은퇴 전부터 관심을 갖고 준비할 것을 조언합니다. 노년의 시기는 나이 들어감과 더불어 성장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노년학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다양한 활동과 참여를 통해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는 ‘활동이론’, 변화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맞는 활동과 휴식을 찾는다는 ‘균형이론’, 주변 환경과의 상호 교류 속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발전시킨다는 ‘역량이론’이 등장했습니다. 방송 등을 통해서 자주 듣는 ‘건강한 노년, 활동적인 노년, 생산적인 노년, 성공적인 노년’이라는 용어는 이처럼 삶의 질 향상과 의미 있는 인생에 대한 바람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자기 계발과 자아실현을 위한 평생교육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1857)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은퇴 준비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필요성은 알고 수많은 조언도 듣지만,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일로 여기지 않다 보니 급한 일에 쫓기고 미적거리다가 은퇴 이후를 준비할 시간을 놓치는 일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해결할 일은 아니어도,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소에 준비하고 훈련해야 하는 좋은 습관처럼, 은퇴 준비는 단번에 할 수 없는 일이니 꾸준한 준비가 필수입니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은퇴 준비와 같은 장기적 과제는 미루지 말고 절박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거나, 어느 순간 낭패 보는 일들이 생깁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반복되는 미루는 패턴을 끊어야 합니다. 20년 넘게 미루기 습관을 연구한 심리학자 이동귀 교수의 인터뷰에서 미루는 습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시험 전날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했는데, 한 학생이 만화책과 유튜브만 열심히 보고 있어 공부는 안 하냐고 물었습니다. 이것만 보고 할 거라고 대답했는데, 공부를 시작하려니 졸음이 몰려와 잠깐 자고 하겠다던 게 푹 자버려 시험을 망쳤습니다. 다음에는 유튜브를 보지 않고 공부하려는데, 배가 출출해 라면을 끓여 먹고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라면을 먹고 나자 너무 졸려 눈만 붙이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내내 자느라 또 시험을 망쳤습니다. 이번에는 유튜브도 안 보고, 라면도 먹지 않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책상이 너무 지저분해 보여 정리를 시작했고, 여기저기 치우고 나니 뿌듯했지만 피곤해 다음 날 늦게까지 잠을 자느라 또다시 시험을 망쳤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사연이 웃기면서도 뜨끔한 마음이 듭니다. 마지막까지 소명을 따라 성경에는 노년에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비록 늦은 나이에 받은 소명이었지만, 부담스러워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빛나는 인생을 산 인물들입니다. 노아는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고, 심판의 날을 대비해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을 500세에 듣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했고, 600세 되던 해에 홍수를 맞습니다. 노년에도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그의 나이 75세 때였습니다.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나섰고, 25년이라는 기다림과 준비 끝에 이삭을 아들로 받습니다.모세는 애굽 사람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80세에 듣습니다. 처음에는 과거의 오점과 능력 없음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40년이라는 긴 세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광야 여정을 이끄는 일을 맡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나이에도 꾸준히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가랴는 아내 엘리사벳에게 세례 요한이 태어나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80세 노인으로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던 선지자 안나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려오는 것을 보고 이 아기가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합니다.요한이 밧모라는 외딴섬에 갇혀 요한계시록을 썼을 때가 90대로 추정됩니다. 바울도 나이가 많았지만, 감옥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전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많은 나이에도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쓰임 받은 인물들입니다. 렘브란트, <성전 안의 시므온>(1639) 출처: Wikimedia Commons 일과 신학의 관계를 성찰한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는 78세에 쓴 『나이 듦의 신학』(Aging Matters)에서 노년의 삶을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합니다.• 소명 - 오늘날은 소명이 상실된 시대로 운명론, 업보, 허무주의, 자아실현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소명은 인생의 모든 의미를 선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결해 줍니다. 노년은 지난 삶을 재정립하면서 새로운 소명을 사는 시기입니다.• 영성 - 노년의 삶은 영적 훈련과 성장의 여정입니다. 성찰하는 삶, 단순한 삶, 하나님 나라의 영성을 키우는 삶은 이 시기에 중요한 요소이고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유산 - 하나님께 집중하며 죽음과 죽음 이후 세상에서의 삶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서 삶의 회복과 창조적인 안식을 경험합니다. 노년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새롭게 성장하며 준비하는 시간이므로 소명을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일을 살아야 합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의 감사 2024년 12월,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국 대통령이 10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미 해군 장교, 핵 기술자, 점잖은 농부, 조지아 주지사, 미국 대통령까지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선에 실패하고 고향 조지아주로 돌아왔는데, 재임 기간 동안 백지 위임으로 맡겨 놓았던 가족 사업이 누적된 빚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행이 책을 써서 빚을 갚으며, 애틀랜타에 카터 센터를 세워 인권에 관심을 두고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을 찾아가 화해와 중재의 역할을 했습니다.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Habitat for Humanity)이 그의 지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고령에도 직접 망치를 들고 사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두 달마다 차례가 돌아오면 자신은 교회 바깥의 잔디를 깎고, 아내 로잘린은 화장실을 청소했습니다. 그가 백악관에서 나오는 날 기자가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카터는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떤 시점이 가장 즐거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카터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 유명한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지금입니다.” 윤두서, <나물 캐는 여인>(연대 미상) 출처: Wikimedia Commons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할 일이 있는 사람의 감사한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 외국에 가며 종들을 불러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이 결산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가져오는데, 이들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달란트를 주셨는데 …”(마 25:20, 22)입니다. 주인이 주신 것, 그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하는 말은 주인에 대한 의심과 불평입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 25:24). 할 일이 있어 감사한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을 평가하는 채권자의 마음이고, 주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율법주의자의 마음이며, 귀한 것을 땅에 감추어 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가 받은 것과 맡겨진 일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건강과 지식, 그리고 삶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나이 든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을 내려놓고,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노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약해지지만,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보다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통찰은 깊어집니다. 이제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일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을 누리고 경험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이미 다 경험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것 없이도 살 수 있고 또 삶에서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몸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것일수록 다 은혜로 받아 누린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도 생색을 낼 일도, 인사를 바랄 이유도 없음을 압니다. 일을 하는 이유도, 일을 통해 기대하고 얻으려는 것도 달라집니다. 노년의 지혜와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