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덴낙원 이야기 1 ]- 막벨라 굴처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창 23:2-4, 19-20).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만 바라보며 살아온 나그네 인생이었다. 60여년의 정처 없는 인고의 세월에서, 목숨을 건 노산(老産)과 그렇게 얻은 아들의 번제(燔祭) 사건은 얼마나 그녀의 심신을 상하게 했을까. 빈소에 들어간 남편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그런데 곡하던 아브라함이 서둘러 빈소를 나와 그 지역에 사는 헷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아내를 매장할 묘실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창세기 23장이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애도는 단 두 구절로 처리하고 대부분을 막벨라 굴 매입과정에 할애한 것은 특이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사실 땅을 소유할 자격조차 없었던 ‘이방인’이며 ‘거류민’이었다. 더구나 그를 존경하던 헷 사람들이 헤브론 지역에 있는 어떤 좋은 묘실도 무상으로 사용할 것을 허락한 터였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시세보다 웃도는 가격을 마다않고 힘들게 막벨라 굴을 사들였다. 왜 그랬을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 17:8)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상징으로 가나안 땅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의 영구 소유권을 취득하여 거기에 사라를 안장(安葬)하였다. 무엇보다도 사라 역시 같은 약속을 함께 받은 이로서 평생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며”(히 11:13) 살지 않았던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 못지않게 그녀의 유지(遺志)를 따르는 것이 소중했기에 사랑하는 남편은 서둘러 빈소를 나왔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상징인 막벨라 굴에 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각별함은 창세기 50장에 서술된 야곱의 장례 여정에서도 발견된다. 우리 아버지가 나(요셉)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창세기 50:5-6, 12-13). 이집트로 이주해 살던 야곱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장사지내러 이집트 고센에서 가나안 막벨라 밭 묘실까지 긴 광야 길을 운구하였다. 죽기 전 야곱이 그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비록 나그네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그는 ‘제국’의 아들로 ‘잘못된’ 곳에 묻히는 것을 몹시 염려하였다.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기에 이집트의 거창하고 화려한 묘지대신 헤브론에 있는 ‘구별된’ 약속의 장소를 고집하였다. 그의 아들들 또한 바로에게 청원까지 넣으면서 먼 운구행렬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만이 아니라 막벨라 굴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의 영원한 소유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 안에서 뿐 아니라 시간 너머 영원한 세계와 영생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한”(히 11:13) 약속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4-16).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어렵사리 구입한 막벨라 굴은 ‘이 땅’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 어떤 지역의 ‘소유’가 아니라 세상 어떤 곳과도 ‘구별되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영원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훗날 출애굽한 그들의 자손들이 뒤쫓는 바로와 그의 군사들을 심히 두려워하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출 14:11)고 모세를 원망했다. 그들이 토로한 불만 속에는 ‘죽어서 어디에 묻히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숨어있으며 약속의 땅과 막벨라 굴의 의미에 대한 체념이 암시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도 인지 못했다.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구별된’ 곳에 묻히는 ‘의미’였지만 실상 그들은 약속의 땅과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경시했으며 영혼과 영원의 세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구별된’ 장소에 묻히는 의미에 대한 소홀로 결국 그들은 구별되지 못한 곳에 묻혔으며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지도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의 약속은 경건한 부자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예수님의 장례 속에서 실현되었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의 시신을 대담하게 요구하여 ‘구별된’ 곳에 안장한 아리마대 요셉의 의지 속에서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이방인 신분임에도 어떻게든 막벨라 굴을 구입하려한 아브라함의 의지를 엿본다. 멀리서 약속을 바라보고 기뻐한 믿음의 선진들이 구별된 막벨라 굴에 묻혔듯, 아리마대 요셉은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대망하며 예수님을 ‘구별된’ 묘실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신 예수님은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심으로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묘역을 어둠과 애통의 공간에서 빛과 약속의 장소로 바꾸어 주셨다. 죽음과 무덤을 두르는 어둠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소망과 영생의 이야기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한 무리의 성도들이 에덴낙원을 건립하였다. 부활소망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구별된’ 안식처가 절실해서다. 에덴낙원은 “소망 없는” 이들을 묻는 어둠의 장소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여 영생할 것을 믿으며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위한 빛의 공간이다. 죽음이 성도에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고 절망이 아닌 약속이며 슬픔이 아닌 안식임을 증거하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의 증거는 ‘구별된’ 이곳에 사랑하는 이들을 누이고 우리 자신들이 묻힘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기에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것이기 때문이다.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는(히 11:4) 아벨처럼, 구별된 곳에 묻힘으로 썩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소망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과 “더 나은 본향”을 바랐던 믿음의 선진들이 막벨라 굴에 묻혔듯이, 부활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구별된 에덴낙원에 안장될 것이다. 에덴낙원은 인간의 시설이 아닌 하나님이 약속이며 무분별한 장묘문화에 굴복한 체 사망에 종노릇하는 묘지를 부활 소망의 현장으로 회복하기 위한 이 시대의 막벨라 굴이고자 한다. “이 글은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엮음, 『신앙인의 품격』(서울: 쿰란출판사, 2018)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