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덴낙원 이야기 2 ] - 공적 복음이 공유 공간을 입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7:55-60).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울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처형을 마땅히 여겼다. 복음의 사람 스데반은 숨질 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행 7:56) 보았다. 그러나 율법주의자 사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율법의 눈에 복음은 감춰질 뿐 아니라 위험하기 까지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임을 당한(롬 7:4) 복음의 사람이니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 스데반은 그렇게 잠들었으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되신 그의 주는 다메섹에서 사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란 스데반의 기도대로 사울도 스데반이 본 것을 보게 하려는 뜻이었다. 스데반이 숨을 거두며 주목한 인자(人子)와 하늘나라는 그가 죽기까지 전하고자 했던 복음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행 5:29)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에게 가려진 것을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열어 놓으셨다. 이것이 첫 순교자가 전한 메시지의 구별됨이다. 천국 복음은 비가시적 관념 속에 갇힐 수 없고 공간의 옷을 입고 구체화돼야 한다는 것. 관념적이기에 사(私)적인 것으로 머물던 복음이 모두에게 공유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 어느 누구도 못한 이 약속을 빈 무덤으로 지키신 그리스도.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영생으로의 길목이다. 다시 깨어날 것을 확신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이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부활하신 주를 직접 만났고 몸소 ‘셋째 하늘’을 경험한 사도의 선포가 모두를 위한 복음인 이유다. 부활의 교리는 있으나 부활의 약속이 잊혀지고, 부활의 선포는 있으나 부활의 기쁨이 없다면, 살아있다는 이름뿐 실상은 죽은 믿음이다. 무덤 속에 허무히 묻힐 뿐 ‘복음’일 수 없으니 ‘만민’에게 나아갈 수 없다.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막 16:15)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이중적이다. 만민을 위한 복음의 전파와 만민에게 다다르는 복음의 ‘공공성’이다. 복음은 ‘공적인’ 것이 되어 모두를 위해 모두에게 나아갈 수 있을 때 전파된다. 부활이 공적인 복음으로 모두를 향한다면 터부시되는 죽음과 기피되는 묘지는 모순이다. 부활 복음이 가장 절실할 때 침묵하기에 ‘구별’돼야 할 장묘가 혼합종교화된다. 부활이 공적으로 고백되지 않는 묘지는 복음이 부끄러운 것으로 ‘탈공공화(脫公共化)’되는 현장이다. 부활 이야기가 기피되므로 죽음이 터부시되고 묘지가 ‘죽음의 공간’으로 외면돼 일상에서 퇴거된다. 외면되는 복음은 교리서 속 관념으로 남을 뿐, 무기력한 관념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하니 죽음을 바꾸겠는가.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 4:20). 삶과 죽음이 ‘부활소망’적으로 바뀌니 우리의 삶에서 죽음이 왕 노릇 못하고 묘지가 죽은 자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터부시되는 썩어짐의 장소가 ‘구별’돼 회복과 교통의 터가 된다. 터부가 구별로 이행하는 만큼 만민에게 다다라, 찾고 머물려는 공적 공간을 내었다. 소망 없는 이도 와서 천국을 ‘값없이’ 살 수 있는 곳. “살아 있다는 이름”만 가진 자들이 부활을 약속받는 곳. 부활신앙이 부끄러운 대신 공적으로 고백되기에 잠자는 자들도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깨어난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요 14:2)는 듯 하늘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긍휼’의 손. 하늘을 우러르는 모든 이들을 거기에 이르게 하기에 넉넉해 보인다. 죽음이 부활로 약속되고 묘지가 삶의 자리로 옮겨온다면 ‘함께’하는 곳이다. 에덴낙원은 삶과 죽음이 함께하며 예배와 일상이 공존하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만큼,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체현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상(像)이 이유 있다. 낮아지신 그가 가장 높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듯이, 스데반이 높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에덴낙원은 주목한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진”(빌 2:7)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높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방언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계 14:6)을 위임하셔서다. 썩지 않는 영원성이어야 진정 모두를 위하듯, 공간적 구체성 없이는 모두를 위할 수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길 간구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나라를 공간화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복음이 공간의 언어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메시지가 되었다. 그렇게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 속에 에덴낙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부활을 깊이 묵상한다. 선진들의 부활소망이 공간화되듯이, 세대를 넘어 후손들의 부활소망도 구체화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엡 1:10)는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눅 22:30)이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대대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사도가 주께 받아 전한 것이고 동일한 것을 에덴낙원은 전한다. 마가의 다락방 최후의 만찬이 하늘의 식탁을 처음 예시(豫示)하였고 2천 년이 하루같이 에덴낙원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후 1:11)를 여기서 말한다. 이곳이 그리스도의 식탁을 ‘상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우리 가운데 임하기에 그렇다. 상징이 ‘실재(實在)’인 것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28:20; 요 14:16)는 주의 ‘말씀’으로 인해서다. 그 말씀을 에덴낙원은 모두의 공간으로 선포한다. “이 글의 일부는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엮음, 『신앙인의 품격』(서울: 쿰란출판사, 2018)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