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을 바로잡다 ①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⑴ ‘죽겠네?’우리말에, ‘죽겠다’는 표현이 은근히 많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힘겹고 어려워서 정말 죽을 지경일 때만 ‘죽겠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을 때도 ‘죽겠네’를 쓴다는 겁니다. 죽을 것 같아서 ‘죽겠네’ 뿐만 아니라, 기쁘고 행복해도 ‘죽겠네’라고 말한다는 사실에 뭔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문화인류학 레포트가 생각나는군요. 꽤나 칭찬을 받았던 기억입니다. 굵고 큰 글씨로, ‘아주 좋은 착안이군!’ 담당교수께서 평을 해주신 레포트의 주제는 한국인의 문화에 대한 자유주제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썼던 글이 주제가 ‘한국인과 죽겠네’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죽겠네’ 뿐만 아니라, ‘죽인다!’, ‘죽을래?’도 있습니다. ‘죽기 살기로’, ‘죽도록’, ‘죽을 만큼’이라는 말도 있지요. 죽음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뜻일까요? 죽음이 삶 속에 있다는 생각일까요? 그런 뜻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의 무의식에 혹은 문화에 죽음과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한국인의 경우만은 아닐 겁니다. 삶과 죽음은 반대말 혹은 상대어이지만 짝이 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말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삶과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으며, 둘 사이를 굳이 분리시키려 하기보다 더 큰 의미에서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결국 언덕길이라는 점에서 하나’라고 했던 말을 응용해도 될듯싶군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1)‘서양의 스승’이자 ‘은혜 박사’라는 칭호를 얻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경우, 삶과 죽음의 문제는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지닙니다. 그에게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흔히, 죽음의 두려움, ‘timor mortis’이라고 사용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고자 합니다)인 동시에 삶을 바로잡아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전적이고 진솔한 신앙의 간증이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고백록』(Confessiones)에서, 우리는 그가 마주했던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의 무게 자체가 죽음에 대한 관점을 세워가는 데 중요한 통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청년기에 친구의 죽음을, 회심 후 어머니의 죽음을, 그리고 그의 신앙의 동료였던 베레쿤두스의 죽음을 기억해냅니다. 각각의 경우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소회를 가지고 있었는지, 『고백록』을 통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제4권에서, 그는 카르타고에서의 유학생활을 잠시 접고 고향 타가스테에 돌아왔습니다. 안타깝게도 마니교에 빠져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고향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갑내기 친구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깊은 슬픔에 빠져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울감을 이겨내기 위해 고향을 다시 떠나갑니다. 이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죽음은 슬픔의 심연 그 자체였고, 죽음의 슬픔으로부터 도피하려 생각으로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보다는 우정에 대한 생각들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구요. 제9권에는 두 경우가 나옵니다. 신앙의 친구였던 베레쿤두스의 죽음,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입니다. 회심하여 세례를 받은 후의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가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아브라함의 품에 거하며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마시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 다 친구의 죽음이지만, 슬픔을 이기지 못했던 제4권의 경우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지요. 신앙 안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해지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을 마주한 경우가 나옵니다. 로마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스티아 항구에서 약간의 정황 탓에 배편을 상당기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와 함께 깊은 기도 중에 신비를 체험하기도 했을 정도로 깊은 신앙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울지 않습니다. 슬픔이 없어서라기보다 천국 가셨을 어머니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죽음에 관해서도 신앙 안에서 성숙한 아우구스티누스를 볼 수 있겠습니다. 주변사람들과 가족의 죽음에 대한 경험은 아우구스티누스만의 경우는 아닙니다. 문제는 죽음에 대한 경험들을 통해 삶과 죽음을 연관 짓는 인문학적 성찰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깊은 슬픔 혹은 상실의 아픔에 대한 경험을 넘어서 죽음의 문제를 신앙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복음 안에서 성숙해지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우리들 역시 죽음을 삶의 태도와 연관 지으려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상적 태도로부터 복음적 관심으로 성숙해지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덴낙원, ‘삶과 죽음을 연관 짓다’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 에덴낙원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삶과 죽음을 분리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신앙인들의 경우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팩트’입니다. 신앙인들은 삶과 죽음의 연관성을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관점에서 인식해야 마땅합니다. 에덴낙원의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게 합니다. 삶과 죽음의 복음적 연관성을 인식하고, 복음적 삶을 복음적 죽음과 하나로 연결 짓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현대인과 신앙인 모두가 주목해야 할 결정적 포인트인 셈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2:13)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문헌들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으로서, 필자의 블로그 <은혜윤리>에 게재되었습니다. 글을 사용하실 경우, 필자와 상의가 필요합니다.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와 ‘죽음의 두려움’(timor mortis): 죽음의 윤리학적 성찰,” 「대학과 선교」40(2019), 161~190., 문시영,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세븐 게이트: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성남: 북코리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