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을 바로잡다 ②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⑵ 생명 데이터?언젠가, ‘개그’ 프로그램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환자의 심전도인지 뇌파인지를 표시하는 모니터 화면에 위험신호가 뜨고 그래프가 평행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보호자가 의사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간절히 매달렸지요. 의사는 천연덕스럽게도, 이런 기계들은 가끔 한 번씩 두들겨 줘야 한다면서 모니터를 두들겼고 이내 다시 화면의 그래프들이 정상으로 표시가 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저 자신이 상대적으로 진지한 편에 속해서인지는 몰라도, 하필 이런 위중한 일을 ‘개그’ 소재로 사용해야 하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요. 그래도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쓴 웃음이 지어지더군요.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의생명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상당한 혜택을 누리고 사는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과 죽음까지도 데이터로 표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객관화, 계량화 등등 말이지요. 생명은 디지털 그래프로 표시할 수 있는 에너지일 뿐일지, 죽음이란 생명 데이터의 소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지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군요. 안타깝지만, 현대사회에서 모니터에 표시되는 디지털 데이터 문제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이해 자체가 계량화되고 있다는 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요. 과연 그럴까요? 생명은 데이터로 환산되는 것일 뿐이고 죽음은 그 데이터의 소멸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이오리듬’이라는 것이 유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적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교로 복무했을 때, 수송관이라는 분이 운전병들에게 아침모임에서 각자의 '바이오리듬' 출력본을 나눠주면서 방어운전하라고 강조하던 장면을 본 일이 있습니다. 운전병의 안전만 지켜지면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바이오리듬'이 정말 다방면에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생체리듬뿐만 아니라, 생명과 죽음을 데이터로 환산하려는 경향이 많아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인문학적 혹은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노력이 절실해지는 이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2)<고백록>에는 주변사람들의 죽음을 마주한 경우들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사경을 헤매던 일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신비하게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가 로마에 있을 때, 또다시 병으로 죽을 위험을 맞이합니다. 이때는 열병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이 이렇게 죄만 짓다가 죽게 되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장면입니다. 제6권에서, 쾌락에 탐닉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죽음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심지어 회심을 앞둔 시점에서도 쾌락을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도 유사한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쾌락을 쫒아 살다가, 회심도 못하고 죽는 것 아닐까?’하는 조바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경우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음을 자신의 삶을 바로잡기 위한 계기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것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는 뜻입니다. 『고백록』의 여러 사례를 통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음의 문제를 삶의 문제에서 생략하지 않았으며 삶을 위한 의미로 받아들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덴낙원, 죽음을 통해 삶을 해석하게 하다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를 통해, 에덴낙원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을 인식하고 삶의 바른 가치를 추구하게 한다는 점은 정말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이란 생명데이터의 소멸이라는 계량화된 설명법을 넘어서 영원에 대한 관심과 안식에 대한 성찰로 이끌어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2:13)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문헌들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으로서, 필자의 블로그 <은혜윤리>에 게재되었습니다. 글을 사용하실 경우, 필자와 상의가 필요합니다.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와 ‘죽음의 두려움’(timor mortis): 죽음의 윤리학적 성찰,” 「대학과 선교」40(2019), 161~190., 문시영,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세븐 게이트: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성남: 북코리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