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을 바로잡다 ③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⑶ ‘timor mortis’‘timor mortis’.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라틴어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죽음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정도 되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죽음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물론이고,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별과 삶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라틴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로마 시기에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고대사회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숙제입니다. 인류 보편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man is mortal’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도 면제될 수 없는 문제일듯싶군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3)라틴시대를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timor mortis’에 대해 기독교의 기존 관점들을 수용하면서도 마니교 논쟁, 도나투스 논쟁, 그리고 철학자들과의 논쟁 및 초기 펠라기우스 논쟁 등을 거치면서 관점을 심화시켜 나아갔습니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timor mortis’ in Allan D. Fitzgerald, ed., Augustine through the Age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9) 항목을 요약했습니다.)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승리주의’(triumphalism) 전통을 수용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갖는다는 믿음이 약한 탓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논쟁들을 겪으면서 초기의 관점을 극복하고 변혁시켜 나아갑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이란 ‘끝’이요 존재와 삶의 결여라는 관점에 관심하면서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됨의 조건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죽음은 모든 것을 망각시키며, 영혼을 파괴하지 못하지만 완전한 망각을 초래하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독백, 2,20,36.) 인간에게는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피하려는 자연적 욕구가 있음을 말하게 된 셈입니다. 마니교 시절, 죽음이란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선이라는 주장에 따랐습니다. 회심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을 반대하면서 육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담의 죄가 육체와 영혼까지도 타락시켰다고 말합니다. 죽음이란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생각한 셈입니다. 마니교와 초기 기독교의 일부 지도자들이 육체를 비하했던 것과는 달리, 죽음의 두려움은 타락한 인간본성의 상징이라는 생각한 셈입니다. 이상적인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타락한 인간본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죽음의 두려움을 갖는 것을 두고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할만한’(understandable *앞에 인용한 ‘timor mortis’ 항목에 사용된 표현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이 두려워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이 영혼이 육체에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영혼이 육체를 넘어 성령께 결합되어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박해의 고통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순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카리타스를 위한 순교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순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광기는 박해 순간의 자살을 칭송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 자체를 반대합니다. 그것은 어둠의 영에 지배당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국론> 저술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들의 관점을 극복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10:28을 인용하면서 야만인들에 의해 죽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자살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죽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신국론 1.23~24) 야만인들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유를 명분으로 하는 자살을 정당화하는 로마의 관점도 거부합니다. 노예가 되어 겪는 고통과 수치심보다 자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반대한 셈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영웅들과 성경의 욥을 대비시킵니다. 욥은 자살하기보다 고통을 감수했지요.(신국론, 19.4)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의 삶이 고통 속에서 악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며 마침내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교자들을 예로 들면서, 죽음의 두려움은 불멸의 명예를 얻기 위한 생명의 허비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때라야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가 죽음이란 죄의 벌이 아니라 본성적 한계에 의한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강력히 반박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며 죄에 대한 형벌로서,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infirmitas)을 말해주는 표식이라는 뜻입니다. ‘사멸성’(mortalitas)이 인간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임을 강조한 셈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겪으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에 집중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 변화된 것처럼, 성령을 통해서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에덴낙원, 죽음을 통한 삶의 성찰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timor mortis에 관심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은 심리학 혹은 정신의학적 요소를 넘어 기독교윤리의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죽음의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입증하고 완성시켜가는 계기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제자도’에 관심하도록 일깨워주며, 이 세상에서 덕스럽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을 심어줍니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죽음이 삶을 바로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셈입니다. ‘timor mortis’,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은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제자의 윤리를 실천해야 할 당위성을 강력하게 보증해줍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삶의 복음적 자성으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에덴낙원’의 이야기에는 죽음을 통한 삶의 성찰이 담겨있는듯싶군요.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2:13)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문헌들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으로서, 필자의 블로그 <은혜윤리>에 게재되었습니다. 글을 사용하실 경우, 필자와 상의가 필요합니다.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와 ‘죽음의 두려움’(timor mortis): 죽음의 윤리학적 성찰,” 「대학과 선교」40(2019), 161~190., 문시영,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세븐 게이트: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성남: 북코리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