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의 복음적 성찰 ⑵ 우리말에, ‘죽음’과 ‘복음’은 라임처럼 들어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장난 같기는 하지만, 이 부분을 끄집어 낸 의도는 분명합니다. 웰다잉의 복음적 성찰을 강조하고 싶은 셈입니다. 죽음에 대한 관심을 복음에 대한 성찰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죽음에서 복음으로’, 관심의 전환 혹은 인식의 심화가 필요합니다. 사실, 웰다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의료적, 법률적 요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의료적 요소로서, ‘연명의료’의 개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포함됩니다. ‘안락사’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기환자는 <연명의료계획서>(POLST: Physician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를, 일반성인은 미래의 경우를 대비한다는 뜻에서 <사전 연명의료의향서>(AD: Advance Directives)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 의료진의 소견이 반영됩니다. 법률적 요소로서는 연명의료중단을 <웰다잉법>을 비롯한 법률이 정한 범위 안에서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할 이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정된 의료기관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추정동의’에 대해서도 법률이 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추정동의까지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POLST 혹은 AD가 없는 경우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여 동의를 내려야 한다면 친족의 범위와 순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법률이 정한 절차를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웰다잉에 관한 인식은 민간자격증을 강습하고 남발하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배경에 의료윤리와 관련된 오랜 논의들이 있었고 거기에 법률적 요소들까지 포함하여 다양하고 종합적인 논의과정이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최소한의 영양공급 과정에 대한 인식도 필수적이고 ‘호스피스’ 의료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관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에 관한 자신의 통찰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연명의료중단을 마치 내가 내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연명의료중단을 선택한 것이요 자연사를 선호하는 것일 뿐, 죽음 자체에 대한 권리를 자의적으로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주권은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 노릇하기"(Playing God)를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주권을 재확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웰다잉의 신학적 지평입니다. 의료 및 법률의 관점을 포함하되 삶과 죽음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웰다잉의 기독교친화성을 말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점입니다. 사실, 기독교인 아니어도 연명의료중단에 대해 동의하는 경우들은 얼마든지 있지요. 연명의료중단으로부터 삶과 죽음에 관한 인식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이 기독교와 친화성을 가지는 부분입니다.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복음으로 인한 박해를 받아 처형을 당하게 된 지경에서도 복음을 배신하지 않았던 점을 성찰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복음의 가치, 부활소망의 신앙에 대해 복음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정체의식과 연관됩니다. 삶의 남은 시간들을 통해 복음에 대한 재발견과 복음적 정체의식에 집중하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복음 안에서, 웰다잉에 관한 성찰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부활소망을 따르는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강인한 의지에 의한 ‘정신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이기도록 이끌어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재발견하는 단계에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소망의 복음 안에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도록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긍휼의 복음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죄의 흔적들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음의 순간에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부활의 소망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웰다잉의 복음적 성찰에서 필수적으로 관심해야 할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2:13)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문헌들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으로서, 필자의 블로그 <은혜윤리>에 게재되었습니다. 글을 사용하실 경우, 필자와 상의가 필요합니다.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와 ‘죽음의 두려움’(timor mortis): 죽음의 윤리학적 성찰,” 「대학과 선교」40(2019), 161~190., 문시영,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세븐 게이트: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성남: 북코리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