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의 임마누엘 우리의 임마누엘 ] ¹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기 28:10-15). 고향과 가족 외에 보호 장치가 없던 시절. 이들을 떠나야 하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무모하고 안쓰러운 일인가. 그런데 그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것을 가로채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못을 모의하고 실행할 때 이미 마음으로 그들을 등졌던 그가 일이 들통 나 위험에 처해지자 이제는 몸으로 그들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고향과 가족 외에 신뢰공동체가 없던 때, 공동체의 근간과 가족의 신뢰를 무너뜨린 자가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어도 동정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도 그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난처한 쪽은 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만 앞설 때 먼저 행동으로 나선 쪽은 하나님이셨다. 문제를 일으킨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피신할 곳이라고는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뿐이었던 모양이다. 참담함 속에 홀로 하란으로 가다 밤이 되어 노숙하게 된다. 광야 길. 지치고 피곤한 인생이기에 편안한 잠자리가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누구로부터도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공동체와 가족(그리고 가족이 섬기는 신)을 저버린 그의 처지가 이미 광야 같으니 거기 아무데나 돌 하나 가져다 베개 삼아 몸을 웅크릴 뿐이다. 누구보다 쉼이 필요하나, 누구보다 자격이 없는 사람. 어딘지도 모를 노숙의 장소는 어디로 향할지,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그의 현실을 말해준다. 정신적 혼란 한 가운데서 갈급한 육체의 쉼이 대조되는 한뎃잠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날 밤 그에게 주어진 것은 만족스런 육체의 ‘쉼’ 대신 내적 혼란을 걷어낼 영적 ‘꿈’이었다. 그가 잠 속에서 본 것은 상상도 이해도 안 되기에 꿈으로만 있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층계’가 보이는데 자신이 누운 땅에서 시작하여 그 끝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층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늘에서 유래하여 땅에까지 다다르는 층계. 마치 낮은 땅에서 높은 하늘이란 이어질 수 없는 먼 별개라는 시각을 교정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려 하심이 더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등졌다고 생각된 하나님은 ‘다행히’ 크게 오해받으셨다. 하나님은 먼저 등진 그와 함께 하시려 앞서 그곳에 와계셨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앞뒤를 살펴야 하는 이 여행자에게 위로부터 고요히 임하셨다. 왜 하나님은 의미 없는 시간에 이름 없는 곳(루스)의 가장 자격 없는 자에게 ‘잘못’ 나타나셨는가. 아버지와 형의 낯을 피해 떠나온 순간 벌써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던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브엘세바에서 상처받고 분노하는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먼저 찾아가셔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이 모든 비극이 자신의 편애 때문이라고 자괴할 어머니 리브가를 위로하시는 건 어떤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자격 없는 자가 누워있는 잘못된 곳으로 하강하신 것이다. 이 의외의 현현이 사람들과 세상에게 불공평하나,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위해 불의한 자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자신의 잘못으로 무명의 장소에 노숙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카이로스의 시간에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릴 곳에 현현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은 불평을 들으셔야만 할까? 하나님은 과연 엉뚱하시고 편애하시는가?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는 창세기 28장 12절은 이 의문이 피상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세 유대학자 라쉬(Rashi)에 따르면 “오르락내리락”은 위로 올라가는 무리와 아래로 내려오는 다른 무리의 천사들이 임무 교대하는 모습이다. 즉, 상승하는 그룹은 고향 브엘세바에서 야곱을 보호하던 천사들이고, 하강하는 무리는 그가 가게 될 이국땅을 맡을 이들이다.² 야곱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달갑지 않아 하는 이들의 가슴까지 떨리게 하는 사실 아닌가. 하나님은 언제 부턴지 모를 오래 전부터 어디서부턴지 모를 모든 곳에서 야곱과 함께하시길 멈추지 않으시며 그를 지켜봐오셨다. ‘이상한 꿈’ 체험은 하나님의 항구적 동행의 순간적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님은 때가 찼을 때 그리스도를 지상에 내려 보내 자격 없는 모든 인류에게 그리 하실 셈이셨다. 이 또한 비교할 수 없이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노숙하던 야곱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겠다”(창 28:15)는 여호와의 불공평한 약속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약속에서 정확히 재연되었다.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이며 똑같이 자격 없는 인간 모두에게 불공평하게 계속될 임마누엘의 공평한 약속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편 139: 7-12) 1 이 글은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엮음, 『신앙인의 품격』(서울: 쿰란출판사, 2018)에 실렸다. 2 Gorden W. Wenham, Genesis 16-50, 윤상문, 황수철 역, 『창세기(하)』(서울: 솔로몬, 2006), 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