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인생과 소명1) 우리는 아직 완성되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우리를 제작하시는데 노년에도 마찬가지입니다.2)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혁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수 혁명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요. 우리는 우리의 증조부들보다 평균적으로 34년을 더 오래살고 있습니다.”3)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작가이며 반전운동가인 제인 폰다는 자신의 TED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다. 제인 폰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나이’에 관하여 여전히 ‘과거의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위기(危機) 중 하나를 상기시킨 그녀의 이야기는 10년이 지난 지금 숙성된 듯 울림이 더 깊다. 그 사이 그녀의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와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을 전하는 강의는 있었으나 생각을 바꾸는 학습은 더뎠다. 의료기술발달과 식생활개선 등으로 평균수명이 계속해서 증가해 100세 시대가 되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지표인 ‘최빈사망연령(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 90세가 이미 우리 사회에 도래했으니 100세 시대는 이제 새로운 표준 곧 ‘뉴노멀’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100세 시대를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보건사회연구원 국민인식 조사결과가 있었다. 제인 폰다의 강연이 있었던 바로 그 해다. 너무 긴 노년기와 빈곤, 질병, 역할상실, 고독 등이 달갑지 않은 100세 시대의 이유로 알려졌다. 보람되고 생산적인 활동과 이를 통한 “폭넓은 사회관계망”의 형성과 유지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중년 이후의 시기는 쇠퇴기가 아닌 발전기라는 제인 폰다의 주장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 삶은 어느 순간부터 하향하는 아치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계속 성장하는 계단이 더 적절한 비유라고 했다. 그렇다면 100세 시대는 필요한 ‘2차 성장’을 위한 ‘제2인생’을 살도록 허락된 기회가 되지 않을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로새서 3:23) 할 때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 되는 소명의 관점에서 볼 일이다. 인간은 창조 시에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피조계에 대한 청지기적 다스림의 임무로 부름을 받았다.4) 의미 있는 존재와 활동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 각자에게 늘 있으며 그것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세상과 사회가 우리를 더 이상 불러주지 않을 때도, 부름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스스로 느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조건과 상관이 없는 이유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에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외려 어떠함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다. 더구나 “자기 아들까지 내주신 이”(로마서 8:32)에게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의 자격이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때는 결코 없다. 나이가 들어도 우리가 계속해서 자라가야하고(에베소서 4:13)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해야 한다. (시편 92:14)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름 받은 곳으로 은사와 사명이 부여되기에 성장과 발전의 전제이며 조건이 된다. 따라서 부름 받은 인간의 눈으로가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제2인생으로 계속해서 빚어 가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와 세상을 보아야한다.『소명』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란 현재의 우리의 모습 및 행위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차 우리의 될 미래의 모습과도 관련된다.”고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어떠함’보다 더욱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다른 무엇보다 우리를 더욱 정확하게 규정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고정된 상태나 조건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운동으로, 인간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삶의 성취를 향해 쉼 없이 움직이는” 존재란 뜻이다.5) 우리의 삶이 보다 이상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소명의 틀에서다. “영구적인 은퇴나 끝없는 휴가(기도와 묵상을 위한 수도원으로의 피정까지 포함해)”가 선호되나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위한 창조적 노력”을 선택해야한다.6) 나이가 들수록 더욱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았던 이들이 아브라함을 포함한 믿음의 선진(先進)들이다.(히브리서 11장) 어떤 일이나 분야든 봉사, 배움, 취업 등에로의 부르심에 응하여 나만을 위해 예비된 일을 찾아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이다. 따라서 프레드릭 뷰크너는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소명이라고 설명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한 교회 사역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일도 전부 소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각자는 자신의 소명 내에 머물고 자신의 은사에 만족하며 살라”란 루터의 말이 평생 하나의 직업에 ‘충실히’ 종사하는 소명을 뜻할까? 그렇다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적용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은 직업의 생성과 소멸이 점차 빨라져 일생동안 하나의 직업만 갖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 직종으로의 이직과 여러 일을 병행하는 겸직이 점차 늘어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대응으로서 자유로운 직업 선택이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지대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부르심은 우리가 발전과 성장을 이룰 자유와 기회를 얻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일은 늘 우리의 봉사와 섬김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일은 새로운 도전이자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성령께서 관여하시는 모든 시공(時空)에서 펼쳐지는 일의 영역은 그래서 우리가 기피하거나 주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뛰어들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유쾌하지 않은 삶의 경험을 통해 더 나은 나로 세워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인생을 여러 단계로 나눠 살아야하는 100세 시대는 직업을 순차적으로 바꾸는 “통시적(diachronic)” 복수 직업과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공시적(synchronic)” 복수 직업에 대한 요구가 증가할 것이다.7) 지금까지 우리는 인생을 3단계로 이해하며 살아 왔다. 먼저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진 뒤 은퇴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애주기는 평균수명 65~70세와 연동되기에 100세 시대에는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백세 인생: 저주가 아닌 선물』8)을 공동 저술한 런던비즈니스스쿨의 린다 그래튼(Lynda Gratton) 교수와 앤드루 스콧(Andrew Scott) 교수의 주장이다. 수명연장의 시대에는 ‘교육-일-퇴직’으로 이어지는 3단계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삶의 단계를 더욱 늘려(multi-stage life)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제2인생을 위한 재교육이 요구되며 새로운 분야로 이직하거나 직업의 기회를 찾아 겸업이 잦을 것이다. 생애주기도 ‘교육-일-퇴직’의 ‘직선형’에서 벗어나 재교육과 재취업을 반복하는 ‘순환형’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실험 정신을 갖고”, 인생 전반에 걸쳐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9) 이들의 제안은 제인 폰다가 인생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성장하는 계단’이라고 역설한 것과 다르지 않다. 노년에 대한 성서신학자 루이스 셰켈(Luis Alonso Schőkel)의 아래 설명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을 옹기장이나 조각가로 묘사하며 구약성서의 많은 본문들이 하나님을 제작자(히브리어 어근 yṣr)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우리를 제작하시는데 노년에도 마찬가지다.” 루이스 셰켈은 이렇게 말하는 근거를 구약성경이 인간의 “기질과 정신 상태”를 나타낼 때도 “운명을 형성해 가다”란 의미의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을 사용한 것에서 찾는다. 우리의 생애는 ‘제작’은 되었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기에 ‘마지막 손질’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10)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덧없음을 상기시키면서도(시편 103:15) 늙어도 여전히 열매 맺는 삶을 살 것을 교훈한다.(시편 92:14) 1) 이 글은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엮음, 『신앙인의 품격』(서울: 쿰란출판사, 2018)에 실린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2) Luis Alonso Schökel, Bozzetti biblici di anziani, 박요한 영식 역, 『노년...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성서의 노인들』(서울: 가톨릭 출판사, 2000), 14.3) Jane Fonda, (2021.1.26.접속), “Life’s Third Act”,4) https://www.ted.com/talks/jane_fonda_life_s_third_act5) Max Stackhouse, Globalization and Grace, 이상훈 역, 『글로벌시대의 공공신학: 세계화와 은총』 (서울: 북코리아, 2013), 266.6) Danie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신옥수, 백충현 역, 『기독교조직신학 개론』(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255.7) Nancy Pearcey, Total Truth, 홍병룡 역,『완전한 진리』(서울: 복 있는 사람, 2006), 98.8) Miroslav Volf, Work in the Spirit: Toward a Theology of Work(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1), 108-109.9) Lynda Gratton & Andrew Scott, The 100 Year Life, 안세민 역,『백세 인생: 저주가 아닌 선물』(서울: 클, 2017).10) Gratton & Scott, 『백세 인생』, 10.Luis Alonso Schökel, Bozzetti biblici di anziani, 박요한 영식 역, 『노년...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성서의 노인들』(서울: 가톨릭 출판사, 200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