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덴낙원 이야기 3 ] - 에덴낙원에는 시인의 시간이 흐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전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염원했던 윤동주. 그가 다짐했던 것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윤동주에게 “모든 죽어가는 것”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억눌리고 차단돼 충분히 살지 못한 모든 존재들이다(이혜원, 106). 제국의 힘은 죽음의 세력처럼 거침없었고 그가 사랑하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잊혀갔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듯한 절망의 시간은 이들의 죽음을 사실화하고 불행한 운명을 확정할 뿐이었다. 하지만 압제자들의 힘이 어떠하든 ‘공간’을 침탈하려는 그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마 10:28)아닌가. 그래서였을까. 우리가 몸보다 더욱 영혼이며 덧없는 공간보다 영원한 시간적임을 알았던 믿음의 청년은 영혼에 주목하고 영원한 세계에 호소하였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憧憬)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윤동주가 선택한 것은 총칼도, 외교도, 이념도 아닌 ‘기억’이었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憧憬)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여기서 “사라져가는 이름들을 별을 노래하듯이 하나하나 떠올리는” 기억은 “그 이름들에 내재한 무수한 잠재된 시간들을 귀환”시킨다(이혜원, 106).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부여된 생명을 누리지 못한 많은 이들의 시간들을 돌이키고 되살린다. 역사의 시간 속에서 충분히 살지 못한 그들은, 윤동주가 별을 세면서 떠올렸던 어머니, 어린 시절의 친구들, 가난한 이웃사람들이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그들 “모든 죽어가는 것”은 구원받아 회복되기에 과거는 불행하게 종결된 채 단지 회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살아나 지금 새롭게 경험된다. 그렇다면 왜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완전한 복구와 구원을 현재 증언하고 경험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 1:10) 총괄갱신(總括更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롭게 되어서다. 바울이 말한 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되었다(고전 15:22).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참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모든 단계를 거치셨고 죽음까지도 우리와 나누셨다(sharing)(리용의 이레니우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6-7). 인간의 모든 면, 곧 생명, 고난, 죄책, 죽음을 고스란히 짊어지셨기에 우리의 복구과 구원은 몸과 혼, 영, 의지를 아우르고 우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른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으로”(사 53:6) 우리의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롭게 되었다(계 21:5). 따라서 기억은 상실, 좌절, 후회로 유폐된 과거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미 복구되고 구원된 현재로 떠올려 향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미 좌절이 소망으로 바뀌었고 고난이 은혜로 변했으며 트라우마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다(계 21:4). 시인의 기억 속에서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좌절과 후회의 시간이 아니라 “반드시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시간”이며, 마침내 모두 회복된 채 현재로 소환돼 기쁨과 소망과 감사로 새롭게 누려진다(이혜원, 99). 과거의 시간이 기억을 통해 현재 이곳에서 새롭게 되살아나는 데는 다른 시간과 다른 시간 의식이 있어야한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져 직선적으로 흐르는 “공간 관점의 시간”이 아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벧후 3:8),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이 말하는 “영의 관점에서 느끼는 시간”(헤셸, 174)이다. 영의 세계에서 보면, “일분과 한 세기, 한 시간과 한 시대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헤셸, 177). “하나님의 영원함 앞에서는 모든 시간이 동시(同時)적”이기 때문이다(몰트만, 54). 영원이 시간적으로 동시성(同時性)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모든 생명은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아기 그리스도”는 산상 설교자(성인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똑같이 현존하며,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던 예수는 로마 군인이 세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한 예수”와 똑같이 현존한다. 영원은 시간적인 의미에서 동시성(同時性)을 뜻한다(몰트만, 54). 부활한 그리스도의 전(全) 생애가 온전히 회복돼 동시적으로 존재하듯 부활의 영에 이끌리는 모든 믿는 이들 역시 그렇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편적인 효력을 갖기에 그의 부활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재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눅 20:38).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이미 현존”하고 있다(몰트만, 87). 그리스도의 전 생애처럼 우리의 전 생애 역시 모두 회복돼 동시적으로 현존하게 된다. 영의 관점에서 느끼는 시간은 그것을 증언하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역시 ‘다시 살아나게’” 된다(몰트만, 59). 그래서 위르겐 몰트만은 “우리가 영위했던 모든 생명은 우리가 죽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말한다(몰트만, 64). 죽는 시간이 부활하는 시간이기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이미 부활했고 깨어났기” 때문이다(몰트만, 65). 십자가에 달렸던 그리스도께서 옆에 달린 사람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 되시려는 것”(롬 14:9)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의 무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은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립니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 안에 있습니다”(몰트만, 65).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 이미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 안에서 깨어 있으며,” 다만 “우리는 시간으로 인해 그들과 떨어지게 된다”(몰트만, 88). 그리고 기억은 우리를 그 시간에 이르게 해 온전히 복구된 그들을 인지하고 향유하게 한다. 그들이 “영원 안에서 우리 곁에 있다”(몰트만, 88)고 말하는 이유이다. 암울한 역사의 시간, “무력감과 자괴감”에 갇힌 윤동주가 선택한 “저항”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이혜원, 106). 이것은 “공간의 관점에서 시간”을 사는 이들에게 비치듯 절망하는 식민지 청년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이 아니라 “영의 관점에서 시간”을 느끼는 그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다.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기억’함으로써 “그리운 대상들을 되살리고 다른 시간을 소환”하는 것이다(이혜원, 106). 따라서 “모든 죽어가는 것”이 되살아나는 기억은 새로운 시간, 덧없고 소멸하는 공간과 무관한 영의 관점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이다. 제국의 힘이 지배하는 “공간 관점의 시간” 너머에서 시인이 별을 세며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 그들의 비가역적 과거가 복원되며 미완의 행복이 완성되고 이뤄진 구원이 향유된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새로워져 시간적으로 동시성 속에서 지금 경험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억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마 10:28)에게 더 이상 저항적일 수 없다. 동일하게 기억은 성도들에게 시인의 시간을 공유하고 죽음의 세력을 능히 이기게 한다. 에덴낙원은 기억을 통해 종결된 과거의 시간이 되살아나 온전히 복구되고 새롭게 돼 다시 현재화하는 곳이다. 억압, 좌절, 후회의 생애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회복(총괄갱신)돼 지금 여기서 경험된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영생의 부활로 “옛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다”(고후 5:17). 여기 죽은 자들의 깨어남은 “이 땅에서 누렸던 생명의 전체성이 깨워지고 일어나는 것”이다(몰트만, 129).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 맞는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상처 입고 죽었던 생명의 치유”(몰트만, 129)도 포함한다. 실패한 삶의 부분,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 침묵하고 실천하지 않은 것 등, 이미 지나가버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행동과 사건을 고통스럽게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죽었으나 죽음의 순간 이미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 안에서 깨어 있는” 이들의 복구되고 새로워진 삶을 지금 여기서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우리의 부활이 이미 현존”(몰트만, 87)하는 것을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고 영의 관점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 10장 7절은 “의로운 자를 기억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라고 말한다. 기억을 하고 기억이 있는 에덴낙원은 공유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간 너머를 지향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롬 14:8)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만유의 주 그리스도의 통치는 보편적이어서 “모두가 [그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한다(빌 2:11). 그리스도의 통치는 산자와 죽은 자가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사귐”을 가리킨다(몰트만, 58).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 연결된다(몰트만, 58). 삶과 죽음이 이어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요 5:24) 에덴낙원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산자와 “이미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 안에서 깨어 있는” 죽은 자가 모두 그와 사귐 가운데 있는 곳이다. 영의 관점의 시간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에덴낙원은 공유의 공간이며 동시에 공간 이상으로 공유의 시간을 말한다. 우리의 사귐(요일 1:3)은 공유된 공간에서만 아니라 더욱 공유되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훨씬 더 낫다고”고백했다(빌 1:23).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원하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상상하건대 그는 육신으로 있으면서도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그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시간, “영의 관점에서 시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롬 14:8)이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신학도 이러한 시간의식을 반영한다. 믿는 자에게 삶과 죽음 간, 산자와 죽은 자 간은 시간적 거리가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거리는 메워졌다. 양자 간에는 시간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의 다름, 곧 공간 관점과 영의 관점의 시간 간 다름만 있을 뿐이다. 구원은 다른 시간과 다른 시간의식을 갖게 한다. 아브라함 헤셸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헤셸, 181)이라고 말했다. 기억을 통해 가장 어두운 시간에 가장 밝은 세계를 보았던 윤동주가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느낀 시간일 것이다. 시인처럼 우리가 이곳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 그들은 투명한 밤하늘의 별처럼 우리 위로 날아 내릴 것이다. 에덴낙원에는 시인의 시간이 흐른다. <참고문헌>이혜원. 2018. “윤동주 시의 시간의식”,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9집: 85-114.Heschel, Abraham J. 2007.『안식』. 김순현 역. 서울: 복 있는 사람.Moltmann, Jürgen. 2020. 『나는 영생을 믿는다』. 이신건 역. 서울: 신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