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교의 기원과 특징 무교는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몽고, 만주, 한국, 일본과 우랄∙알타이 어족 사이에 공유되었던 원시종교인데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색을 가집니다. 한국은 종교적 바탕이 무교였고, 4세기 이후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전래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종교들이 ‘무교화’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교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도 한국그리스도인의 의식에는 무교적 요소가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교는 한국 문화의 실체’이며, ‘한국 문화는 무교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무교가 민간신앙이나 미신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분명한 종교적 특징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무교의 기초는 ‘자연숭배/정령(精靈)숭배’ (animism)로 모든 물체에 정령이 있다고 믿습니다. 죽음으로 육체를 떠나간 영혼은 초인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천지 사이에 충만해 있는 정령들과 혼백들이 인간 세상의 질병과 재해를 일으키거나,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영계와 인간 사이에서 중재적 역할을 하는 ‘샤먼’(무당)이 있어야 합니다. ‘무’(巫)라는 한자의 위쪽 선은 하늘을, 아래쪽 선은 땅을 상징하며, 수직선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능을 나타내고, 수직선 양쪽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샤먼은 제사장 역할을 하는 자로 정령과 직접 교통하고 영적인 능력을 행하며, 재액[재앙으로 인한 불운]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제정일치였던 고대 사회에서 샤먼이 곧 지도자였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남녀 모두 샤먼이 될 수 있는데, 세습, 아니면 학습을 통해 될 수 있습니다. (2) 무교의 죽음 이해 무교에서 죽음은 슬픈 일이자 한스러운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유복한 삶을 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은 사람은 선한 영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한 영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악령이 된 영혼을 달래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고인의 죽음이 일어난 장소에서 치르는 ‘집가심’ [혹은 ‘자리걷이’], 고인이 비자연적 죽음을 당한 지 3년 이내에 고인의 원한이나 억울함을 풀어주어 원귀가 되지 않고 저승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전라도 지방에서 행하는 ‘씻김굿’[서울∙경기 지방에서는 ‘진오기굿’, 경상도 지방에서는 ‘오구굿’이라 부름]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치르는 것은 무교가 이승과 저승을 서로 동떨어진 공간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길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나 고분 벽화에서도 무교의 영향을 보게 되는데, 죽은 자들을 위해 생전과 동일한 생활환경을 조성해 주고, ‘저승길’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은 저승길 여정을 거쳐 14일 [달의 차고 기움에 상응] 후에 저승에 당도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승에 있는 죽은 자들은 이승을 드나들며 산 자들에게 복이나 화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산 자들은 초혼(招魂)을 통해 죽은 자들의 혼령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열렸던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한국 여성신학자가 주제 강연 후 소복 차림에 신을 벗고 종이를 태우며 ‘초혼제’를 시연했습니다. ‘성령의 오심’을 ‘초혼’과 연결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원주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잠시 침묵하다가 곧 박수갈채를 보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어디서 저런 무당 같은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정통적인 삼위일체에 의거한 성령론을 거부한 것으로, 어쩌면 그녀의 무의식 내지 잠재의식 속에 자리하던 무교의 영향으로 가능했던 퍼포먼스였다고 여겨집니다. 결과적으로 WCC에 대한 비판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무교에서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죽음을 초월하여 ‘재생’한다고 믿습니다. 무교가 믿는 재생은 불교의 ‘윤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재생은 죽음 이후 또 다른 삶이 이어진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반해, 윤회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삶이 수레바퀴처럼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무교는 사후 심판에 대한 인식을 갖지 않았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후 심판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무교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이승에서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현세의 복에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3) 무교가 한국그리스도인에게 미친 영향 한국 무교에 나타난 특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한국그리스도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의타성’을 들 수 있습니다. 천지신명이 인간의 운명과 삶을 좌우한다고 믿었으므로 길흉화복은 모두 운명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중개자인 무당이 자기를 대신하여 영계와 교제해 준다고 믿습니다. 한국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를 존중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목회자에게 의존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목사의 심방이 축복을 가져다주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안수)기도하는 목사를 무당과 같은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섭리에 대한 기대보다 영력의 주술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심방을 할 때도 이왕이면 부목사가 아닌 담임목사가 와 주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합니다. 마치 ‘큰 무당’ [일에 종사한 햇수가 오래고 영험하기로 이름난 무당]이 ‘작은 무당’보다 더 ‘영험하다’ [속된 말로 ‘영빨이 세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는 생각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믿음은 각자의 실존적 결단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안일한 의타주의로 환원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둘째로, ‘현세주의’입니다. 현재 어떻게 하면 재액과 불확실함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복된 생활을 즐길 수 있는지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집니다. 이러한 경향은 무병장수, 입신양명, 부귀영화 등을 삶의 최고의 목표와 이상으로 삼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고유한 말에 과거와 현재를 의미하는 ‘어제’와 ‘오늘’이라는 말은 있는데, 미래를 나타내는 말은 없고 한자어인 ‘내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교는 다른 종교들을 받아들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종교로 받아들였고, 일부 한국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공성이 부족한 현세주의로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듣고서도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재물을 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