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리터러시 ①개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리터러시‘literacy’라는 말은 문맹(文盲)의 극복을 뜻합니다.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문해교육이 필요했지요. 글을 모르던 사람들에게는 글을 읽게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인생의 전환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에는 리터러시라는 말이 여러 곳에 사용됩니다. "유튜브 리터러시"는 유튜브에 관한 사용법과 이해도를 높이는 것을 뜻합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라고도 씁니다. 리터러시가 문자읽기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여러 방면에 적용되는 셈입니다. 이해도를 높이고 활용법을 익히는 등의 요소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접근하게 함으로써 정체를 알게 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바른 태도를 가지게 한다는 점입니다.삶과 죽음에 관해서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죽음윤리"라는 말을 쓰는 경우, 그것은 죽음에 관련된 윤리적 성찰을 뜻하는 것이지만, 죽음에 관한 리터러시 혹은 "죽음 리터러시"(Literacy of Death and Life)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연명의료의 중단’을 뜻하는 (*존엄사라는 명분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이 결코 아닌!) ‘웰다잉’ 시대에 죽음윤리를 말한다는 것은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존엄한 삶을 위한 자세를 갖추자는 뜻이 됩니다. 죽음을 금기시하고 외면하다가 두려운 죽음을 맞을 것이 아니라, 존엄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존엄한 삶을 위한 가치관을 구현하자는 취지가 담겨있습니다. 『신국론』(De civitate Dei)아우구스티누스의 3대 저작을 꼽으라고 하면, 100여권이 넘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고백록』, 『삼위일체론』, 그리고 『신국론』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신국론』은 방대한 분량만 아니라 스케일 자체가 남다른 대작입니다. 노년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심혈을 기울인 이 책은 총2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초의 역사철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 사이의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전개와 갈등 및 역설을 서술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성이 승리할 것이라는 기독교의 직선사관을 담아내었습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깊은 통찰이 담겨있습니다.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은 윤리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현실에 있는 특정한 국가나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사랑’(amor)의 존재입니다. 느낌이나 호르몬 작용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의지의 핵심요소를 뜻합니다. 영원을 사랑하고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바른 사랑으로서의 ‘카리타스’를 지닌 존재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최초의 범죄에 나타난 교만을 통하여 한시적인 것들에 숭상하고 집착하는 사랑의 왜곡 상태에 빠졌습니다. ‘쿠피디타스’라고 합니다.카리타스를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부르며, 쿠피디타스에 빠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지상의 도성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의 로마가 정복과 지배의 탐욕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지상의 도성이 지닌 단면을 볼 수 있겠습니다. 로마 = 지상의 도성이라는 도식화를 하면 안 됩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정치적 현실의 모습들에서 지상의 도성이 지닌 특성들은 다양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쿠피디타스에서 카리타스로 회복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가능합니다. 쿠피디타스의 도성과 카리타스의 도성이 혼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 길을 가는 동안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특히, 제Ⅰ권에서이 책의 첫 부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러시를 읽어낼 단초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 대한 독법은 다양합니다. 이제까지의 선행연구들에서만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읽기가 시도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러시를 읽어낼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죽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존엄한 삶을 위한 가치관을 세울 통찰을 얻자는 뜻입니다.흥미로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마주한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입니다. 당시의 로마사회와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심하게 ‘안티’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정령숭배사상이 남아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로마가 여러 내적 요인들에 의해 타락하고 외부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하게 되자,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탓했습니다. 정령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를 따른 탓에 로마가 망해가고 있다는 힐난이었습니다.하지만, 교회는 야만족(로마의 기준이겠지만)의 침략을 받았을 때, 교회로 피신한 로마인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잔인한 정복자였던 로마인들과 달리 야만족들은 교회로 피신한 자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한 로마인들이 야만족의 퇴각 이후 기독교를 비난하는 정황이 이어졌습니다. 이 와중에, 로마인들은 죽음의 문제에서도 기독교를 안티했습니다. 야만족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 자살한 로마의 여인들을 영웅시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보다 이르든지 보다 늦든지 인생의 종결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붙여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천줄 신국론(문시영 요약본)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도 살해당했고 온갖 끔찍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언젠가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일의 삶 가운데 수많은 죽음에 의하여 그런식으로 위협당하면서도 어떤 죽음이 닥칠지 모르고 있다.더 나은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면 죽음은 재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죽음을 좋지 않게 만드는 것은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응보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인간들은 어떤 사건으로 죽느냐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염려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에 다다를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죽음 리터러시"로마의 죽음 이해와 기독교의 죽음 이해를 비교하여 기독교 죽음이해의 복음적 정체성을 보여준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천국과 영생, 그리고 부활소망의 신앙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죽음의 본질과 정체를 파악하면 삶의 가치와 의의를 말할 수 있다는 뜻에서, "죽음 리터러시"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사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각자가 속한 문화와 전통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기독교가 말하는 죽음이 서로 다르듯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이해를 통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기준하여 죽음의 본질을 인식하고 죽음과 삶에 관한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죽음 리터러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따지고 보면, 죽음에 대한 종교의 통찰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의료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정황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종교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점은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죄의식을 부추기는 등의 역기능을 한다는 반론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인들이 지닌 죽음관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죽음이해를 제시한 것처럼, 죽음에 관한 바른 이해가 절실한 셈입니다.이러한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정황을 고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입각한 죽음 리터러시에 관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음 리터러시를 제시한 것처럼, ‘죽음의 본질을 알면 두려워 할 것도 없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이어지는 복음적 관점을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을 인용하여 『신국론』 제Ⅰ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10:28) 그리고 이렇게도 말합니다. 끔찍하고 잔혹하게 죽을지라도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시116:15)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복음에 입각한 죽음 리터러시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복음 안에서 존엄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약2:13)*새세대윤리연구소 블로그에 게재되었으며, 인용하실 경우에는 필자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