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리터러시 ②본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죽음 리터러시" 삶과 죽음의 윤리에 ‘죽음 리터러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리터러시가 문맹을 극복하고 진리에 다가서게 한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리터러시는 죽음에 대한 금기 혹은 막연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의 의의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이끌어 주며 삶의 바른 방향성을 점검하게 해 주리라 기대됩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은 최초의 역사철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역사문제만 다루는 책은 아닙니다. 좀 더 큰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풀어냅니다. 이것을 변증 혹은 호교(辨證, 護敎, apology)라고 부릅니다. 특히, 로마사회가 기독교를 ‘안티’하던 정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설명은 기독교가 취해야 할 정공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 아주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집니다. 역사의 문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철학 및 신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포함됩니다.삶과 죽음에 관한 기독교적 통찰은 이러한 광범위한 논의를 위한 주제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거부 혹은 혐오가 널뛰던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차분하고도 설득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안티가 여전한 오늘의 정황에서 배워야 할 부분일 듯싶군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설득적 변증은 기독교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정체의식을 확인하고 확립시키는 동시에 기독교를 혐오하는 자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일방적 혐오를 극복하도록 촉구하는 중요한 방편이라고 하겠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러시는 이 부분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안티하면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어오는 정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신앙한다는 내용을 설득적으로 풀어냄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일방적 혐오를 넘어서게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죽음에 관한 바른 인식에 이르도록 한다는 뜻이지요. 안티의 계몽? 호교와 환대!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러시의 지향점에 관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 사이의 변증법적 전개를 다룬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지독한 안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 정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를 재반박하거나 정죄하기 보다 기독교를 호교하는 데 관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을 진리에 초청하고 환대했습니다. 야만족의 침략 때, 교회로 피신한 로마인들을 환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안티를 향하여 기독교의 입장을 계몽하려하기보다 그들이 진리의 길에 들어서도록 호교하고 환대했다는 뜻입니다.왜 그랬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겪어온 지식의 여정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했고, 진리를 알고 진리를 가진 자로서, 진리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진리에 초대하고 환대했습니다. 여전히 안티를 당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가 주목해야 할 요소일 듯싶군요. 안티에 대한 반박은 악순환을 낳을 뿐입니다. 진리에 입각한 진정성을 보여주고 실천하며 그들까지도 진리의 길에 초대하고 환대하려는 노력이 정공법일 것 같습니다.죽음 이해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상의 도성이 지닌 죽음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도성이 제시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지닌 죽음관이 진리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하나님의 도성을 안티하는 지상의 도성을 계몽시키려 하기보다 그들을 진리에 초대하고 환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읽을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지상의 도성에 속한 자들을 부활소망의 진리로 초대하고,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에게는 부활소망의 진리를 따라 죽음이해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이었습니다. 『신국론』 제XIII권에서전체 22권으로 구성된 『신국론』을 샅샅이 뒤져서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신국론』은 방대한 지식의 저수지라고 할 수 있으며 바른 해석과 응용의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역시 일종의 해석이자 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 리터러시’라는 관점에서 말입니다.특히, 제XIII권에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명시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부분을 잘 읽고 응용하면 ‘죽음 리터러시’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전부 옮겨 적기는 곤란하지만, 내용을 보면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문장 몇 곳을 문맥에 맞추어 인용해 보겠습니다. 육체 속에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인간은 이미 죽음 속에 있다.(XIII.10) 최초의 죄로부터 죽음의 기원을 끌어들였고 부패한 본성을 안은 채 태어났다.(XIII.13) 최초의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떤 종류의 죽음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XIII.3) 하나님은 인간을 바르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발적으로 타락하여 정죄 받았다. 불행에 연좌되어 끝이없는 둘째 죽음으로 이끌려가고 있다.(XIII.14) 죽음은 죄의 값으로 닥쳐왔다.(XIII.15) 죽음은 태어나는 자의 형벌이지만 신앙과 덕성으로 감내하는 경우, 부활하는 자의 영광이다.(XIII.6) 악인들에게는 악한 죽음이요 선인들에게는 선한 죽음이다.(XIII.8)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이 있다.(XIII.12) 구세주의 은총을 받으면 둘째 죽음은 벗어날 수 있다.(XIII.11) 성도들은 부활을 고대한다.(XIII.20)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둘째 죽음에서 구원했다.(XIII.23.1)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핵심적으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당시의 로마에서 통용되던 죽음관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으며 기독교가 말하는 죽음관의 정체성을 강조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죄의 형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부활의 소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 이해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가 관심하는 것은 죽음이 금기시되어야 할 그 무엇 혹은 대책도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로마사람들이 신봉하던 정령들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것도 아닌, 죄의 형벌이라는 점을 말해준 부분은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에 직면한 것은 인간 외부의 원인 예컨대 정령들이 인간에게 해코지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댓가임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부활소망의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과임을 깨우쳐줍니다.이것은 기독교 교리를 되풀이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죽음에 관한 리터러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의 정체를 깨우쳐주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심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준 죽음 리터러시의 핵심입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설명에서 인간을 면책시키려는 야비함을 넘어서도록 이끌어 줍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성찰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 영생, 그리고 부활소망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죽음 리터러시의 핵심은 ‘천국, 영생, 그리고 부활소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관점이자 성경의 약속입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적어놓기만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 주제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변증이요 호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플라톤철학의 유산을 이어받은 당시의 철학자들을 반박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부활소망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도 있습니다.(XIII.16~19)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서의 인간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플라톤철학에 대한 반박입니다. 이것은 부활소망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강조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음을 죄의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부활의 소망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 리터러시의 기독교적 특징이자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대할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통하여 영생, 천국,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말하는 것은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게 하고 복음 안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문장에 나타난 것처럼, 이 문제의 해결에서 ‘은혜’의 중요성에 유의해야 합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염원하던 자유 대신 가혹하고 불행한 노예 신세가 되었다. 은혜에 의하지 않는 한, 영원한 죽음으로 정죄받을 자가 된 것이다.(XIV.15.1) 다시 말해,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고 죽음을 이기며 영생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리시가 말하는 해법입니다.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금기시되거나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신 것을 믿으며 부활소망의 신앙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죽음 리터러시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소망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약2:13)*새세대윤리연구소 블로그에 게재되었으며, 인용하실 경우에는 필자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