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리터러시 ③과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죽음의 정체파악으로 끝?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러시에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자체는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특히, 지상의 도성이 지닌 죽음의 이해를 넘어서 하나님의 도성이 제시하는 죽음이해를 추구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죽음에 관한 진리를 인식시키며 그 진리에 초대하고 환대하는 것은 진리를 지닌 기독교가 해야 할 과제이자 사명이라 하겠습니다.우리가 짚어보려 하는 것은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부활소망의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죽음 리터러시는 과연 죽음의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리터러시는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바른 이해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은 죽음에 대한 진리 즉 부활소망의 신앙을 바탕으로 지상의 도성에서 섞여 사는 동안에 그 진리를 적용하며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이러한 뜻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삶의 실천과제로 전환해야 죽음 리터러시가 완성됩니다. 죽음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고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 자체로도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고 구현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자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죽음 리터러시로 읽을 때, 각별히 주목해야 할 요소입니다. 『신국론』 XIX~XX권에서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통하여 다양한 이야기들을 일관성있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죽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의 도성이 말하는 죽음의 이해를 정죄하기보다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리에 관심하게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에 그들을 초대하고 환대합니다.또한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에게 죽음의 진리를 재확인해 줍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고, 천국과 영생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부활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의 실천과제를 제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국론』 XIX, XX권을 요약하면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야말로 최고선이요 영원한 죽음이야말로 최고악이다. 영생을 얻고 죽음을 피하려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XIX.4.1) 철학자들은 선과 악의 목적이 현세생활에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악으로 점철된 현세의 삶을 두고 고통스러운 삶을 마치기 위해 죽음을 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행복일 수 있는가?(XIX.4.4)현세의 악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피해야 하는 것이요 자결할 정도로 무겁다고 해도 그러한 악 속에서의 삶이 여전히 행복하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사멸하는 현세에서 최고선의 목적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덕은 신앙인들에게만 있다. 그들은 인간이 불행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불행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 않는다. 인생이 이 세상의 숱한 악에 비해 비참할 수밖에 없지만, 장차 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 희망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 철학자들은 그 행복을 믿으려 하지 않기에 이 세상에 헛된 행복을 설정하려 한다.(XIX.4.5) 우리가 배워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심판이 있다는 것과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XX.5.1) 지금은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섞여 있지만, 그때에는 가라지 비유처럼 가려질 것이다.(XX.5.2)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정죄의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XX.6.5)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에 관한 지상의 도성이 지닌 인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도성이 말하는 죽음의 인식에 관심하도록 촉구합니다. 특히, 죽음을 삶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지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바르게 이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순교자 본받는 순례자‘순교’와 ‘순례’의 개념은 이 부분을 풀어갈 핵심요소입니다. 요점은 분명합니다. ‘순교자를 본받아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는 순교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전승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교자들의 생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순교자들이 지상에서의 죽음과 동시에 하늘의 영원한 삶에 들어갔다고 일깨워줍니다. 또한 순교를 영원한 생명의 계시라고 해석하면서 부활과 불멸의 진리를 강조합니다. 순교자들을 영웅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로마인들은 용기와 명예를 위한 자살을 칭송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는 야만인들의 노예가 되어 겪는 고통과 수치심보다 낫다는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영웅들과 성경의 욥을 대비시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악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과정이지만 마침내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했던 셈이지요.그리고 ‘순교’에서 ‘순례’로 관심을 전환시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교를 도덕적 교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순교자들을 본받아 살도록 독려한 것이지요. 요점은 이것입니다. ‘순교자를 본받아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세상에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신 영원한 생명에의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세상에 집착하는 쿠피디타스의 삶을 극복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카리타스를 추구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교자들에게 이러한 가치관이 있었기에 순교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순교자들처럼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웰다잉시대의 ‘죽음 리터러시’웰다잉시대의 질문과 연결시켜 볼까요? 앞질러 요약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존엄한 죽음을 말하고자 한다면, 존엄한 삶에 관심해야 한다.’ 웰다잉이 법제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연명의료중단에 관심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죽음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근거로 웰다잉에 관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 이유를 비롯한 ‘존엄한 죽음’을 명분으로 하는 여러 이유에 의해 웰다잉에 관심하기보다 죽음에 관한 진리에 입각하는 것이 맞습니다.그리고 죽음에서의 존엄에 관심하는 데 멈출 것 아니라, 삶에서의 존엄을 말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죽음에 관한 진리에 기초하여 삶의 진리를 말하고 실천하자는 뜻입니다. 죽음 그 자체에 관심하는 것도 의의가 있지만, 그것을 통하여 오늘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웰다잉시대에 죽음 리터러시,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죽음준비교육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윤리에 관한 강좌를 통해서, 교회의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우리들 모두가 관심해야 할 과제입니다. 책임지고 해야 할 교육의 주체가 별도로 있다기보다 우리 모두가 관심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목회자와 신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동관심사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죽음을 앞둔 존재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정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삶의 존엄에 관심하고 그 실천에 나서자는 뜻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약2:13)*새세대윤리연구소 블로그에 게재되었으며, 인용하실 경우에는 필자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