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죽음 설교 ①소리 없는 영적 메아리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내달린다.1) 즉, 누구나 생명체로 존재한다는 건, 죽음을 등져 메고 살아가는 모순적인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은 생애에 자신의 흔적들을 남기며 살아가는데 그 흔적들은 나중에 한 사람의 역사가 된다. 때로 한 사람이 남긴 인생 흔적들은 훗날 국가 역사의 일부분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가 남긴 흔적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한 그는 남긴 흔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그려냈으며 영국 교회 역사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로이드 존스가 남긴 신학적 흔적들과 영국 교회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면 지면이 부족할 것 같다. 간략히 정리한다면, 설교자로서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 대전(World War II)이란 시대적 아픔과 영국 교회의 영적 쇠락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목회를 토대로 놀라운 교회 부흥은 이뤄냈다. 특히, 대장암 수술 이후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 교회 담임 목회에서 은퇴한 뒤에, 저술가로서 주옥같은 자신의 설교들을 출판하여 후대 설교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영국 사회와 교회의 급격한 변화에 의한 신학적 사조에 맞서 신학자로서 올곧은 신학 강연들을 펼쳐나갔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은 로이드 존스를 가리켜 목회자, 박사, 저술가, 강연자, 청교도 후예, 설교자 등과 같은 다양한 호칭을 붙이며 그에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에 관한 연구물들을 살펴보면 주로 그의 목회(설교) 사역, 신학 강연, 혹은 성령 세례에 초점을 둘 뿐 로이드 존스의 마지막 삶의 흔적인 그의 죽음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의 ‘죽음 설교’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듯하다. 죽음이란 생명과 대립적 혹은 이원론적이지 않다. 오히려 죽음은 한 사람의 생애를 반추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죽음까지 살필 때에만, 그 사람을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의 죽음과 그의 죽음 설교를 헤아릴 수 있다면,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기 위한 신앙적인·신학적인 방점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로이드 존스의 죽음과 그의 죽음 설교에 함축되어 있는 ‘죽음 신학’을 살펴보면 로이드 존스의 설교 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죽음과 죽음 설교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로이드 존스의 무덤에 함축된 죽음 신학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그 자체가 메시지(The preacher is the message)며 설교자에게 자신의 삶은 진정한 메시지(the preacher's life is the real message)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이드 존스의 무덤은 그 자체가 그의 죽음 설교로서 소리 없는 영적 메아리라 할 수 있다. 인생 끝자락을 직감한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고향인 웨일즈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매장지로 카디간(Cardigan)에서 10마일 떨어진 작은 뉴캐슬 엠륀(Newcastle Emlyn)에 있는 칼빈주의 감리교(Calvinistic Methodist)에 속한 벧엘 교회 공동묘지를 선택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사후에 평범한 묘비 위에 고전 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를 새겨줄 것을 요청했다.2) 이처럼 로이드 존스의 유언은 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평범한 유언과 죽음은 크게 세 가지 ‘기독교적 죽음 신학’ 의미를 말없이 전해준다. 첫째, “어디에 묻혀야 되는가?” 과거에는 사람이 죽으면 통상적으로 자신의 고향에 묻혔다. 왜냐하면 태어난 곳에서 생을 마무리한다는 건, 자신의 본질적 태생에 관하여 후대들에게 소리 없이 알려줄 책임이 죽은 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장례는 어떤가? 죽은 자의 장례는 일반적으로 화장(火葬)하여 육신적 태생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거나, 때로는 납골당을 통해 육신적 태생을 알려주나, 불신자들과 함께 안장되기 때문에 영적 태생이 지닌 복음적 가치가 손상된다. 더불어 죽음이 죽은 자를 믿음의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납골당은 죽은 자의 종교에 따라 납골 구역이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생전에 어디에 묻힐지를 정해놓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선사받은 육신적·영적 태생을 후대들에게 말없이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후대들은 늘 죽은 자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확인한다. 이런 면에서 로이드 존스는 무덤을 통해 자신의 육신적 태생이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육신적 태생이 웨일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기에 로이드 존스를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웨일즈에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자신의 고향인 웨일즈를 자랑했다고 말한다.3) 게다가 로이드 존스는 설교 도중에 웨일즈어를 영어와 함께 구사하고 웨일즈어로 된 찬양을 부르곤 했다. 그의 지독한 웨일즈 사랑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알기에. 로이드 존스의 장례는 웨일즈 찬송가와 함께 웨일즈풍의 확신과 승리가 가득한 예배로 진행되었다.4) 또한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무덤을 통해 자신의 영적 태생이 웨일즈에서 성령의 부흥을 일으켰던 칼빈주의 감리교(혹은 웨일즈 장로교)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왜냐하면 그의 무덤은 칼빈주의 감리교에 속한 벧엘 교회 공동묘지에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어렸을 때부터 웨일즈 랭케이토(Liangeito)에 위치한 칼빈주의 감리교에 속한 렝케이토 교회에 출석했는데, 랭케이토 교회는 청교도 시대에 웨일즈의 부흥을 주도했던 다니엘 로랜드(Daniel Rowland)가 시무했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자연스럽게 칼빈주의 감리교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말씀 중심의 목회를 추구할 수 있었다. 둘째,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누구나 삶의 목적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보편적인 인생의 목적은 개인의 번영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기독교인이라면 죄로 오염한 세상이 추구하는 실존주의적 목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독교적인 삶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삶의 목적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설정되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5) 로이드 존스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에게 기독교적인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설교로 격려하기를 주저 않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들은 유독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1문답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는 삶의 본질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세상이 흠모할만한 의사 신분을 내던지고 상한 영혼을 치유하는 설교자로 일생 동안 헌신했다. 설교자로서 그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창조자의 창조 목적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사후에 웨일즈 외딴 곳에 자신의 묘비를 평범하게 세워주길 원했다. 아마도 로이드 존스가 지극히 평범한 묘비를 세우길 원했던 이유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위대한 설교자였다는 찬사 받기를 거부하고 오직 설교자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리고 싶은 신앙의 표현일 것이다. 셋째, “공동체를 이끌어간 방식은 무엇인가?”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가장 큰 단위인 국가 공동체에 머물며 공동체를 보전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또한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공동체를 사랑하며 발전시킬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교회에는 목사를 가정에는 가장을 세우셨다. 목사와 가장이 공동체를 섬기는 방식에 따라 교회 공동체와 가정은 그 방식에 동참하며 삶의 변화를 추구해 나간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가 교회 공동체와 가정을 지켜나간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묘비에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을 기록했다. 바로, 고전 2:2절이다. 로이드 존스 묘비에 새겨진 고전 2:2절은 그가 남웨일즈 샌드필즈 베들레헴 교회(Sandfields Bethlehem Church)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설교한 성경구절이다. 로이드 존스는 오로지 그리스도만 선포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설교 목회 방식을 고수했다. 거기에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했으며,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방식으로 가정을 지켜나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가치관이었다. 특히, 로이드 존스는 아내 베단(Bethan Phillips)을 사랑했는데, 지금 그의 무덤이 있는 뉴캐슬 엠륀은 아내를 처음으로 만난 지역이며 아내의 가족이 묻혀 있는 곳이었다.6) 로이든 존스의 아내는 나중에 죽은 로이드 존스의 무덤에 합장되기를 소원했다. 로이드 존스가 죽은 후, 그의 딸과 사위(Elizabeth and Frederick Catherwood)는 로이드 존스가 보여준 교회와 가정의 향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버지] 로이드 존스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으며, 더 넓은 영역의 교회 가족에게까지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온정을 부었습니다.”7) 1) Sanctus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s Confessions I. II, 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24.2) Steven J. Lawson, The Passionate Preaching of Martyn Lloyd-Jones, 김제권 역,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만나다』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7), 42-43.3) Iain H. Murray, Life of D. Martyn Lloyd-Jones Vol 1, 김귀탁 역, 『로이드 존스 평전 1』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42-43.4) John Peters, Martyn Lloyd-Jones, Preacher, 서문강 역,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 (서울: 지평서원, 2007), 68-69.5) Francis A. Schaeffer, How should We then live? 김기찬 역,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4), 323-25.6) Lawson,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만나다』, 42-43.7) Frederick Catherwood & Elizabeth Catherwood, Martyn Lloyd-Jones The Man and His Books, 이중수 역, 『마틴 로이드 존스와 그의 독서 생활』 (서울: 양무리서원, 199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