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죽음 설교 ② 교리 강해 유년 시절에 가난했던 로이드 존스는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장학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에 공부를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자 로이드 존스는 열심히 공부하여 1911년도에 장학생 시험에서 차석을 하며 트레가론 카운티 중학교(Tregaron County School)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로이드 존스는 포웰(S. M. Powell) 선생을 만나 인생의 대전환이 일어나게 되며 의사의 꿈을 키워 나갔다.8) 1914년에 가난했던 로이드 존스의 아버지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고, 1916년 10월에 로이드 존스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대 가운데 한 곳인 성 바돌로매 부속 의학교(St. Bartholemew's Hospital)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는 1921년 런던대학교에서 의사면허증을 취득 후, 당시 영국 국왕인 조지 5세(George V)의 주치였던 토마스 호더(Sir Thomas Horder) 아래에서 의사로서 철저한 훈련을 받으며 세상적인 성공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는 내면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에 항복한다. 그리고 그는 상류층의 삶을 포기하고 영혼을 살리는 목사의 길을 걷게 된다.9)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 받았다는 확신과, 자신이 의사로서 환자의 고통을 치료하더라도 종국에는 죄 때문에 사람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10) ‘죄와 죽음의 문제’를 깨달은 로이드 존스는 1927년도에 남웨일즈 샌드필즈 베들레헴 교회(Sandfields Bethlehem Church)에서 첫 담임 목회 사역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11년 6개월을 사역하면서 로이드 존스는 놀라운 부흥을 일으킨다. 1935년 8월에 웨일즈 랭케이토(Liangeito)에서는 웨일즈 부흥을 이끌었던 다니엘 롤랜드(Daniel Rowland)의 회심을 기념하는 200주년 야외 예배 집회가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그 집회를 이끄는 설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대받았는데, 그가 설교하는 8월 16일에 무려 7000여명이나 설교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리고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청중들 중에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에서 담임 목사로 사역하던 켐벨 몰간(Campbell G. Morgan)도 있었다. 몰간은 자신의 후임 목사를 물색 중이었는데, 후보 중 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였다. 당시, 몰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자였으며 그가 섬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2000명이 출석하는 런던을 대표하는 대형교회였다.11) 1935년 12월 29일에 몰간은 로이드 존스에게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 후에는 로이드 존스에게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동사 목회를 제안한다. 그리고 몰간은 80세가 되던 해인 1943년 7월에 로이드 존스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담임 사역사로 세운 뒤 은퇴하며12)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 동안 단독으로 목회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놀라운 부흥을 이끌어낸다. 물론 로이드 존스는 초창기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담임하면서 2차 세계대전(World War II)이라는 어려움과, 몰간의 목회 철학에 익숙했던 성도들과의 마찰로 인하여 녹녹치 않은 목회를 펼쳐나갔다. 특히, 영국 교회 현장에는 2차 세계대전이 안겨준 교회 재건의 필요성과 ‘고난과 죽음’이란 절망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때에 웨스트민스터 채플 지체들은 교회 재건과 부흥을 위해서 예전에 몰간이 오랜 시간 운영했던 금요일 저녁 성경 학교를 다시 시작하자고 로이드 존스에게 부탁한다. 왜냐하면 2차 세대대전이 끝난 후, 런던으로 돌아온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교회로 향하게 할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13) 한편,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금요일 저녁 성경 학교를 운영하면 교회 성장에는 도움을 될지 모르나, 다른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이 수평 이동할 문제가 있다는 점과, 다른 교회에서 설교 부탁을 요청받는 횟수가 빈번했기에 반대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대전의 산물인 ‘인간 무능력을 향한 절망’을 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망이 찾아올 때에 반드시 절대자를 찾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 그렇기에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성경적 교리를 가르칠 필요성과 ‘고난과 죽음’에 관한 지속적인 설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결국, 로이드 존스는 ‘교회 재건을 위한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지체들의 요구’, ‘성경적 교리를 가르쳐야 하는 당위성’과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핫이슈가 된 고난과 죽음에 관한 신학적 가르침’이라는 3 가지 목적을 충족시키고자 금요일 저녁 성경 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1952년부터 55년까지 성경 교리를 설교로 가르쳤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그는 주일에 고난과 죽음에 관해 설교하기 위하여 대표적으로 하박국, 시 73편, 베드로후서, 요한복음 14장을 연속적으로 강해했다.15) 아무튼, 금요일 저녁에 선포된 로이드 존스의 교리 설교는 크게 세 부분 -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God The Father, God The Son), 『성령 하나님』(God The Holy Spirit)과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The church and The Last Things) - 으로 나뉘며 ‘고난과 죽음’은 세 번째 부분 가운데 6장부터 23장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로이드 존스는 고난과 죽음의 신학적 연관성을 6장에서 심도 깊게 설교한다. 로이드 존스는 6장에서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죽음이 무엇인지를 반추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종말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죽음은 죄의 형벌이며 사후에는 영생과 영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과 핵폭탄 출현으로 누구나 죽음의 사선에 내몰릴 수 있다는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6) 특히,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과 죽음’의 신학적 의미를 교리 설교를 통해 정확하게 가르쳐줘야 할 시대적 사명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 대전으로 고통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고난과 죽음’이 필요한지 역설적인 신앙적 답안을 제시해야 하는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교리 설교 6장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라는 시 119: 67, 71절을 통해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설교한다. 또한 그는 죽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영화의 자리로 초대하는 축복이라고 설교한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는 신자에게 죽음은 오히려 유익이며, 주변 사람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17) 또한 로이드 존스는 시 73편에서도 ‘고난과 죽음’에 관한 연관성을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우리의 징계[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탱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궁극적인 영화로 가게 하시는 과정들이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18) 결국, 로이드 존스가 ‘고난과 죽음’에 관한 교리 설교로 궁극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점은 무엇인가? 바로, 그는 신자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천국의 삶 가운데도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불멸의 진리를 교리 설교로 가르치고 싶어 했다.19) 사람은 막상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죽음을 회피하거나 부인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 내면에 두려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20)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죽음에 관한 교리 설교에는 ‘영원’이란 용어가 복선으로 깔고 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가 설교했던 하박국, 시 73편, 베드로후서, 요한복음 14장, 히브리서 등을 살펴보면 ‘영원’, ‘영광’ 또는 ‘영화’라는 용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용어들은 신자의 죽음이 끝남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새로운 출발이란 점을 부각시킨다. 8) Murray, 『로이드 존스 평전 1』, 53-56.9) Murray, 『로이드 존스 평전 1』, 142; Peters,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 28-3310) Murray, 『로이드 존스 평전 1』, 118, 16311) Hughes Oliphant Old, The Reading and Preaching of the Scripture in the Worship of the Christian Church Vol 6: The Modern Age (Michigan: WilliamB. Eerdmans Publishing Co, 2007), 875-7712) Iain H. Murray, Life of D. Martyn Lloyd-Jones Vol 2, 김귀탁 역, 『로이드 존스 평전 2』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179-80.13) Murray, 『로이드 존스 평전 2』, 189-90, 286-87\14) Murray, 『로이드 존스 평전 2』, 233.15) 물론 , 1950년 10월 10일부터 1952년 4월 6일까지는 산상수훈 강해설교, 1952년 5월 4일부터 1953년 7월 19일까지는 요한복음 17장 강해설교를 했다. 그러나 논문은 죽음 설교가 중심이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에 관한 그의 설교만 나열한 것이다. Murray, 『로이드 존스 평전 2』, 398-402.16) Martyn Lloyd-Jones, Great Doctrine of the Bible Vol 3: The Church and The Last Things, 장광수 역,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서울: CLC, 2000), 79-8317) Lloyd-Jones,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84-85, 108, 30018) Martyn Lloyd-Jones, Faith on Trial, 서문강 역, 『믿음의 시련』 (서울: 청교도 신앙사, 1993), 16419) Lloyd-Jones,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9420) Elisabeth Kübler-Ross, On Death and Dying, 이진 역, 『죽음과 죽어감』 (파주: 이레, 2008),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