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구천을 헤매는, 좀비 콘텐츠 속에서, ‘부활소망’을! “이 영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사오니...” 전도사 시절, 해외선교지를 방문 중이던 목사님을 대신하여 인도한 장례예배에서 원로장로님의 기도에 등장한 표현입니다. ‘구천’(九天)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아 보였지만, 거리낌 없이 사용하시는 모습에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습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이겠지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부해 보이는 이 표현에 관심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주제로 학술지에 글을 제출했을 때, 제 취지를 이해 못하는 분들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누가 이런 말을 합니까?’라는 반응도 있었고 대학생 리포트 정도의 평이한 주제라서 학술논문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제가 충분히 풀어내지 못했던 탓이지만, 혹시 이런 생각들 아니었을까요? 부활소망은 기독교신앙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을, 이렇게 평이한 주제를 논문으로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 말입니다.지금이야 부활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인식 내지는 내세관에서도 변화가 수반되는 결단이 필요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장로님께서 ‘구천을 헤맨다’고 표현하신 것은 그 중요한 흔적일 수 있습니다. ‘구천’을 말하는 전통적 내세관과 ‘부활소망’의 기독교적 관점 사이에서 머뭇거린 흔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내세관의 종교적 습합(習合, syncretism)과 그 흔적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하게 알고 있는 ‘부활소망’은 한국인의 내세관과 관련하여 갈등 내지는 변화의 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라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통적인 내세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아닐지, 짚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과거 세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신과 함께 1,2>는 물론이고 ‘좀비’ 콘텐츠에 열광하는 ‘청춘’들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화기 비교종교론의 ‘종교와 생사문제’ 그리스도인에게서 부활소망은 삶과 죽음의 윤리를 위한 근거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존엄하게 살아가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소망과 전통적 내세관의 흔적이 뒤섞여 있을 우려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조문을 가서 영정 앞에 예를 표하는 방식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묘에 대한 인식과 준비에서 부활소망의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경우들을 여전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개화기 그리스도인들을 참고하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로,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비교종교론’을 선교전략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한국의 전통종교들에 관심하고 그것을 기독교와 비교하면서 기독교가 전통 종교들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선교를 위한 전략의 하나로 비교종교론을 응용했던 셈이지요.흥미롭게도, 선교사들의 비교종교론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계승되면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최병헌(1858~1927), 채필근(1885~1973), 한치진(1901~?*납북)이 대표적입니다. “선교사들이 선교대상인 한국인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종교에 관심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종교문화 속에서 자란 근대의 기독교사상가들은 기독교와의 비교차원에서 세계 각 지역의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 다르다(이진구, 2018: 21)”고 하겠습니다. ‘종교와 생사문제’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것이 이러한 맥락이었습니다.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기독교의 지성인들에게 한국 전통종교의 생사관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던 맥락을 각별히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채필근(1885~1973,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지만)은 『비교종교론』에서 종교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은 ‘생사 문제’라고 단언합니다.(채필근, 1960: 90). 종교와 생사문제가 그의 유일한 관심사인 것은 아니지만, 종교가 지닌 책무와 과제를 ‘생사문제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라고 말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유교, 불교, 도교와의 비교를 거쳐 그는 부활소망의 기독교 생사관을 강조합니다. 그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죽는다는 것은 잔다고 말한다. 또 죽음을 이기는 이김은 신앙이라고 가르친다(채필근, 1960: 95).” 그에 앞서 비교종교론을 전개했던 최병헌은 자신의 개종 경험을 바탕으로 유교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했습니다. 『성산명경』(聖山明鏡)과 『만종일련』(萬宗一臠) 등을 통해 비교종교론을 펼치면서, 완전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유신론, 내세론, 신앙론이라는 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천국과 영생의 교리가 없는 전통종교를 넘어 기독교의 영생의 신앙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철학자라고 알려진 한치진의 비교종교론에서도 기독교와 생사문제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193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개론』을 집필했던 그는 “종교란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인간에게 삶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삶의 근본이요 내재적 목적(이진구, 2018: 173)”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회심과 영생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생사관에 주목하도록 이끌어준 셈입니다. 습합의 우려를 경계하다돌이켜 보면, 한국개신교는 근대적 가치를 구현하는 전환을 낳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최병헌, 채필근, 그리고 한치진은 죽음이해에서 중요한 근대적이고 기독교적인 전환을 선도했다고 하겠습니다. 바른 내세관을 가진 종교이어야 참 종교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영생과 부활의 내세관을 가진 기독교를 변증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문제는 한국기독교가 이것을 충실히 계승하지 못한 채, 좀비 콘텐츠에 무비판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혼합’ 혹은 ‘습합’의 우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생사관은 “영혼이 다른 세계로 간다는 범신론적 생사관,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간다는 기독교의 생사관,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한다는 불교의 생사관, 또한 삶 속에 죽은 이의 자리를 마련해 놓아 제사를 통해 죽은 자가 산 자들의 자리로 돌아와 만난다는 유가의 생사관”(김명숙, 2011)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여덟 가지 유형의 내세관을 말한 연구도 있습니다. “①사후세계는 없다는 소멸형(extinction type), ②인간과 동물로 윤회한다는 현세지향 환생형(present world-oriented transmigration type), ③다른 세계로 윤회한다는 내세지향 환생형(other world-oriented transmigration type), ④현세와 유사한 선악이 나타난다는 저승형(other world type), ⑤선악이 없는 이상적 세계라는 하늘나라형(heavenly home type), ⑥사후세계는 선과 악으로 분립된다는 천국지옥형(heaven/hell type), ⑦천국과 지옥 사이간에 연옥이 있다는 천당연옥지옥형(heaven/purgatory/hell type), 그리고 ⑧천국과 지옥 사이에 다층적 단계가 있다는 다층이동형(multi layer transference type)”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들을 보면서, 한국기독교는 어디 유형 어간을 배회하고 있을지 자성하게 됩니다. 적어도, 한국기독교의 생사관은 구천을 헤매거나 좀비 콘텐츠에 주도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생사관의 습합 우려를 넘어서 복음에 근거한 죽음윤리의 확립에 관심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자체가 습합의 우려를 증폭시키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부활소망의 죽음윤리를 향하여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토대로 존엄한 삶을 위한 윤리에 관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죽음과 삶에 관한 윤리학적 성찰(ethics of death and life)이 필요한 셈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성찰에 그치지 않고 삶에 대한 성찰을 권하는 윤리를 지향하면 더 좋겠지요.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외면하기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말하는 것이 삶의 성숙을 위한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제안하고 싶습니다. 죽음에 관한 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죽음을 교회의 공동체적 관심사로 회복시켜야 하겠습니다. 어느 사이에, 죽음은 교우 개인의 일이자 상주의 결정과 상조회사의 가이드에 목회자가 따라가야 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장례 및 장묘에 이르는 과정에서 교회의 공동체적 관심은 설 자리를 양보하거나 그 책무를 방임하고 있는 셈입니다. 참고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죽음의 이해가 왜곡되고 왔다고 진단한 아리에스(Pillippe Ariès)에 따르면, 12세기 이전에 죽음은 공동체가 함께하는 사건으로서 영생을 믿었기에 부활의 날을 바라보면서 임종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리에스는 ‘우리의 죽음’이라고 표현했지요. 근대 이후 죽음은 개인화되고 말았다는 주장은 ‘우리의 죽음’을 회복할 필요성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가 예수 내러티브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공동체적 관심의 회복을 말한 것과 연관될 수 있겠습니다. 응용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적 정체성에 근간하여 삶과 죽음에 관한 이해를 추구하는 교회적(ecclesial) 관심이 필요하고, 장례와 장묘에 관해서도 교회의 공동체적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존엄한 삶을 위한 윤리에 관심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소망에 근거하여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삶의 존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시키자는 뜻이지요. 삶의 존엄을 위한 책임적 자세로 확장하는 노력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좀비 문화에 대한 무비판적인 소비와 종교적 습합의 우려가 여전하다는 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구천을 헤매는, 좀비콘텐츠 속에서, ‘부활소망’을 바르게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약2:13) *문시영, “기독교죽음윤리를 위한 종교와 생사문제의 응용적 읽기,”「인문사회21」제12-1집(2021)를 경어체로 요약하여 새세대윤리연구소 블로그에 게재했습니다. 인용할 경우,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