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의 기원과 교리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한때 인도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융성했으나, 힌두교에 밀려나 인도 밖으로 전파되어 동양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 고타마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했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했으며, 힌두교에서 섬기는 수많은 신들은 물론 경전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힌두교에서는 영원한 자아(‘아트만’)가 모두에게 있다고 가르쳤으나 싯다르타는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그 외에도 힌두교의 의식과 제사 등을 거부하고 윤리와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불교는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윤회(輪廻)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현세에서 지은 ‘업’1)에 따라 죽은 뒤에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게 되며,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지은 업에 따라 또 다시 다음 내세에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2)과 극락왕생3)을 중요시했습니다. 출가 전에는 감각적 쾌락을 통해 극단적 행복을 추구했던 싯다르타가 출가 후에는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또 다른 극단을 취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양극단을 피해 중도를 가야 한다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 중도로 가는 방법이 팔정도(八正道)인데 고통의 원인인 탐(貪:욕심) ·진(瞋:노여움) ·치(痴:어리석음)를 없애고 ‘해탈’4)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 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을 일컫습니다. 팔정도는 ①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정사(正思):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정정진(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를 따르면 누구나 죽음과 윤회의 순환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는 크게 소승불교,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승불교(상좌부불교라고도 함)는 부처의 가르침대로 철저한 자기 수양을 통해서만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만인에게 열반의 길이 열려 있으며, 깨달은 자가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의 열반을 미룬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을 ‘보살’5)이라 합니다.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불교에서 부처는 소승불교에서처럼 단지 스승에 그치지 않고, 구원자인 신으로 격상됩니다. <테이라스에 이르는 길>이라는 기록영화에서 주인공이 티벳으로 가는 중에 내내 ‘부처님께 빌고’, 사원 마당을 청소한 뒤, ‘부처님, 이제 제 소원 한 가지 들어 주실 거지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부처를 구원자로 여기는 신앙과, 구원이 공덕을 쌓은 대가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2) 불교의 죽음 이해 불교에서는 죽음을 수명이 다하여 체온과 의식이 사라지고 신체 기관이 모두 변하여 파괴되어 육신과 정신이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이 없어져도 업은 없어지지 않아, 다시 사람이나 짐승이나 귀신 등으로 난다는 ‘윤회 전생(轉生)’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명체가 모습을 바꾸는 과정 또는 시기이며,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추이이고 순간적 사건인 것입니다. 불교 신도들은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죽은 자를 위해 복을 기원하는데, 그 기간이 마감되는 49일째 되는 날에 큰 의식(사십구제)을 치릅니다. 죽어서 다음 생을 받는 기간인 7일 동안 출생의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수차례 죽고 태어나는 식으로 여러 번의 7일을 경과하는데, 그 최대기간인 칠칠(7X7일=49일)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출생의 조건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사십구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돌아가신 분을 위해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49일째 뭔가를 해야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제사를 드릴 수는 없으니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에서 고통의 근원은 불변하는 영원한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나는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들은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헛된 생각들을 극복하면 더 이상 태어남도, 죽음도 없으며 욕망도 없게 되는데 이것이 열반이요 업의 흐름이 소멸되는 상태입니다. 해탈은 윤회의 반복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열반과 같은 목표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불교도들은 보다 단순한 목표를 세우는데,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세속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날 미래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3) 불교가 한국그리스도인에게 미친 영향 ‘팔정도’에서 ‘도’의 팔리어6)는 단수형인데, 이는 8개가 하나의 도의 부분들을 구성하고 있고, 8개 가운데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7개가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해지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갈라디아서 5:22-23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열매’가 헬라어로 ‘카르포스’인데 역시 단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아홉 가지 요소를 가진 하나의 열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팔정도’가 주로 정진 수련하는 행위(doing)를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열매 맺게 하시는 존재(being)의 품성을 의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그리스도인이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불교에서 주장하는 ‘정진 수행’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행위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젠가 사월초파일 즈음에 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한 사찰을 지나가게 되어 경내에 빼곡히 매달려있는 연등에 붙어있던 축원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한국불교신자들(어쩌면 대승불교 영향권의 나라들에서도)의 소원을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축원문들은 결국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만수무강(가족건강의 복), 사업번창(재물의 복), 자녀 대학 합격/취직(형통의 복)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기독교에서도 발견됩니다. 구독자가 10만 명 가까이 되고, 누적 조회 수가 수십만인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한 목사가 기도문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필요한 기도이기는 하지만, 주된 내용은 축복해 주시고, 좋은 일만 많이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와 불교신자들의 축원의 내용이 어떻게 차별되는지, 자못 염려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조문할 때 “명복(冥福)을 빕니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불교 사찰에 가보면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명부전(冥府殿)이라는 법당도 있는데, ‘명부’(冥府)는 사람이 죽은 뒤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 혹은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을 의미합니다. ‘명복‘을 비는 것은 명부에 가서 심판받지 말고 좋은 곳으로 가도록 비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거나 좋은 곳으로 가도록 빌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어두운 데로 쫓겨나 이를 갈며 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어두운 데“는 지옥을 의미하는데, ‘명복’(어두운 데서 받을 복)을 빈다면, 그 사람이 이미 ‘어두운 지옥’에 갔다는 말이 됩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은 죽은 자가 연옥에서 좋은 곳(천국)으로 가려면 면죄를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면죄부를 사야 한다는 해괴한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죄를 사하거나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조문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주 안에서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 소망으로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혹은 “삼가 위로의 말씀 드립니다” 등으로 인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현실주의적인 특성은 무교가 형성한 한국인의 심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도 역시 같은 특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현세의 해탈과 내세의 복락에 대한 희망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신라와 고려 시대의 불교는 현실주의적 호국불교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기도불교가 되었는데, 이러한 현실주의가 현실에 대한 책임성을 감당하지는 못했습니다. 의타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면서, 현재를 향락하고자 하는 비생산적이고 이기적인 배금주의 성격도 띠게 되었습니다. 한국그리스도인들에게 발견되는 이러한 경향들은 일부분 불교의 영향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1) ‘業’. 산스크리트어 ‘카르마’.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2) ‘涅槃’.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 현세에서의 온갖 고통과 욕망 그리고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3) 죽은 다음 극락정토에 가서 다시 태어남.4) ‘解脫‘.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자재한 경지. 모든 미혹의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5)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중생’, ‘구도자’, ‘지혜를 가진 자’ 등을 의미하며, 그러한 뜻으로 불교도들이 서로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6) 인도 중부지방의 언어를 기초로 하고 BC 2세기부터 AD 2세기경에 걸쳐 발달한 언어. 5세기 이후 소승불교 경전 기록에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