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의·식·주 이야기 ⑤]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공지능 로봇 이야기– 영화 <채피>(Chappie) 4차 사업혁명과 함께 등장하는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고 예술 활동까지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이미 여러 현장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로봇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며 심지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미래학자들은 일명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고 부르는 현생 일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에 대해 예견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로봇을 만듭니다. 그래서 로봇은 인간 삶의 편의를 위해 일하고, 특히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에 다가가 생명의 위협이 되는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때로 그대로 죽습니다. 로봇의 운명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과정에서 로봇은 죽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림-인공지능 로봇) 소설가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42년 단편 『런어라운드』(Runaround)에서 로봇 3법칙을 언급하는데, 그 내용은 이후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포스트휴먼연구소·한국포스트휴먼학회,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먼』(아카넷, 2016), 182-185.) 1.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이 위험상황에 있을 때 방관해서는 안 된다.2. 로봇은 제1법칙에 저촉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3. 로봇은 제1법칙 또는 제2법칙에 저촉되지 않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하여야 한다. 여기서 보듯이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서 인간은 지배의 주체이고, 반면 로봇은 객체로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새로운 존재를 언급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서는 로봇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일정한 법적 지위를 취득하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며 법적 책임도 부담하는 존재로 봅니다. 기계를 인간과 상호공존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까지 인간처럼 자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인지활동을 하는 로봇은 등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언제 등장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과 상호공존 하는 대상으로서의 로봇이라면 지금처럼 죽음을 인지할 수 없는 로봇과는 다른 차원에서 죽음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지 않으려는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채피>(Chappie, 미국/2015)의 경찰로봇 ‘채피’입니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매일 300여건의 범죄가 폭주하면서 인간경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로봇경찰 ‘스카우트’ 군단으로 경찰업무를 돕게 합니다. 특히 총격전이 벌어지는 범죄현장에서 이 로봇들은 인간들 앞에 서서 인간을 보호하며 임무를 수행합니다. 경찰로봇 스카우트의 제작자인 디온은 경찰청에서 로봇의 추가제작을 요청하면서 회사에서의 입지가 든든합니다. 하지만 그의 최대 관심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문화적 활동이 가능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랜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회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기를 앞둔 스카우트 22에 인공지능을 설정해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로봇 ‘채피’가 탄생합니다.채피는 갓 태어난 아기와 같았습니다. 지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합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열정이 높고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정보를 취득해갑니다. 곧 사람과의 대화는 물론, 그림을 그리는 등 인간의 모습을 갖춘 로봇으로 점차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자신을 제작한 디온이 아닌 갱스터 아빠 닌자와 엄마 요린다와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언어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그리고 범죄활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에서) 채피는 아직 판단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고, 고장 난 로봇에 인공지능을 심어 만들었기에 배터리가 다하면 멈추게 될 제한된 수명을 가진 로봇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죽음 앞에서 불안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인간이 처한 실존과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필요와 욕망 앞에서 바른 판단이 흔들리고 목숨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도 보입니다.채피는 배터리가 다하기 전에 다른 로봇으로 교체되어 죽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위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합니다. 갱스터와 같이 범죄 현장에 참여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습니다. 인간처럼 몸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며 죽지 않으려는 로봇, 그것이 바로 채피입니다. 같은 회사의 또 다른 로봇 제작자인 빈센트는 디온의 라이벌로 인간의 뇌와 로봇이 연결되어 조정하는 로봇,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전투로봇 무스를 만듭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채피의 제작자 디온과 엄마 요린다가 무스에 의해 죽습니다. 그러나 채피는 디온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로봇에 이식해 디온을 로봇으로 살립니다. 또 이미 장례까지 마친 엄마 요린다의 의식을 저장한 USB를 활용해 임의로 공장의 기계를 작동시켜 로봇 요린다를 만듭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죽은 사람이 로봇으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에서) 로봇은 생물체가 아니라 무생물이며 인간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인간은 함께 살며 돌보는 강아지와 고양이는 물론 도마뱀이나 작은 벌레 같은 생명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을 느낍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 대우하기에 공감을 경험하며 반응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로봇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봇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고 인간 삶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여깁니다. 그래서 로봇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필요가 없으면 언제든지 폐기해도 되는 그런 물건으로 간주합니다.그런데 사실 인간처럼 손과 발 또는 얼굴을 가진 로봇은 기계를 다루듯이 쉽게 생각하기에는 머뭇거려집니다. 또 외형이 인간과 닮지 않아도 자신과 대화를 하며 간단하지만 의사소통을 했던 장치를 다둘 때도 조심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과 같이 느끼고 공감하며 인간과 소통하는 로봇이라면 죽는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런 로봇의 죽음에 대해 인간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동시에 그런 로봇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사실 죽는다는 것은 인간과 로봇, 인간과 똑같은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어쩌면 절대적인 기준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로봇이 점점 그 영역을 넓히며 인간을 압도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로봇에게 죽음은 없기 때문입니다.로봇에 적용하는 ‘작동 중단’이나 ‘폐기’를 인간이 말하는 죽음이 담은 의미와 동일시 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단지 행동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추억이라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오래도록 관계를 맺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죽는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기억과 살았을 때의 삶의 자취로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죽음이야말로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 예를 들어, 로봇을 제작하는 사람의 윤리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간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이전하는 것이 가능할지 그리고 의식만 이전하면 정말 그 사람이 될지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들이 있을 수 있는 논쟁적인 주제입니다.그리고 죽지 않으려는 로봇 채피. 어린아이 수준의 지적 상태에서는 죽는 것을 ‘잠을 자는 것’,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죽는다는 것에 대해 알고는 두려워하며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죽지 않을 몸을 얻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이런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차이는 무엇이 될지, 로봇과 구별되는 인간의 인간됨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질문이 많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