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교의 기원과 가르침 공자(B.C.551-B.C.479)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으며 중국 상고시대의 사상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유교를 탄생시켰습니다. 당시는 제후국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기존 질서가 무너진 혼란기였습니다. 공자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진정한 군자(君子)로 육성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진 원인 중 하나가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 있다고 생각하여 ‘진정한 인간다움’(仁)을 회복하고, ‘자기를 극복해 예(禮)로 돌아가야’(극기복례/克己復禮)하며,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정명/正名) 한다는 등의 가르침을 폈습니다. 공자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논어(論語)>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맹자, 순자 등에 의해 이어졌고, 송나라 주자에 의해 주자학(성리학)으로 집대성됩니다. 유교의 가르침의 핵심은 <중용>의 첫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하늘이 명하는 것” 곧 ‘천명’을 알고 행하는 것이 유교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유교는 세계의 운행원리에 관해 많이 언급하지만 창조나 종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를 ‘이기론’(理氣論)으로 설명하면서 창조론이 문제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물질적 차원에서의 논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작용에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본질을 ‘천명’으로 이해하면 세상 역시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교는 종말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은 종말을 초월하여 영원성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절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유교는 인간의 육체는 음양오행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인간의 마음은 하늘과 통하므로 하늘의 이치와 인간 삶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늘과 인간이 일체가 되어 영원히 지속되면,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면 삶과 죽음이라는 한계성을 극복하게 됩니다. 참다운 인간이 되는 방법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입니다. 먼저 자기를 닦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으로, ‘수기’의 방법은 ‘인’(仁)과 ‘의’(義)이고, ‘치인’의 방법은 ‘덕’(德)입니다. 이를 요약하면 ‘몸이 닦여진 후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그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 다음에 천하가 화평해진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것입니다. 이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군자로서,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맹자는 이런 사람은 군자에 머물지 않고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 유교의 죽음 이해 유교는 죽음이 삶의 끝이나 부정이 아니며, 삶의 일부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죽음은 삶의 연속이며 삶의 일부분이므로, 삶을 받아 드린다면 죽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처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은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모든 생명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완성이 됩니다. 삶의 도리를 깨달으면 죽음의 도리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다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장례식을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은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됩니다. 장례식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선을 제시해 둔 것이 상례(喪禮)입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신은 ‘혼’(魂)이 주재하고 육체는 ‘백’(魄)이 지배합니다. 혼백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공존하지만 죽으면 분열하여 ‘혼’은 하늘로 날아올라가고 ‘백’은 지하로 갑니다. 제사는 ‘혼’을 ‘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의식입니다. 분리된 ‘혼’과 ‘백’을 다시 결합시켜 이 세상에 재생할 수 있게 됩니다. 혼백을 부르면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하늘과 땅 사이로 제한된 공간만을 믿었고, 따라서 혼백은 하늘 밖이나 땅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고,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일에 죽은 이의 혼백을 불러들일 때 혼백이 깃들 장소로 탁자 위에 올려놓는 것이 나무판자로 된 신주(神主), 즉 위패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초혼재생’(招魂再生“ 혼을 불러 다시 살아남)을 약속해 주면 안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초혼재생’, 곧 조상제사를 행하는 주체는 자연스럽게 그 자손이 되며, 제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자손들에게 기억됨으로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교의 ‘효’는 원칙적으로 자식이 부모에게 복종하는 미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 종교적 효입니다. ‘효’를 통해 생명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는 ‘정신(혼)의 영원성’을 가르칩니다. 또한 죽어도 자손이 대를 이음으로 ‘육체(백)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영원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유교가 이해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 않고 삶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여겼는데, 공자는 ‘기괴한 일과 폭력, 혼란스런 일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음이 언급된 곳은, 죽은 자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죽은 자의 사후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차원이었습니다. 곧 상례나 제례에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죽음 자체나 그 의미를 밝힌 곳은 없습니다. 공자가 사람의 사후 존재나 세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죽음을 부정하거나 죽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장례와 제사를 강조하면서도 사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 사람은 소멸되지만 그의 사후 존재는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 계속 살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죽은 자를 우리의 삶과 분리해 내는 일이 됩니다. 제사 지낼 때에는 혼백을 살아 있는 듯이 모셔야 한다고 말한 이유일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죽음은 삶이 비롯되고 이루어지는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다른 차원의 세계와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죽음을 ‘삶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죽음은 단지 ‘삶의 종료’라는 객관적 사건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았던 개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윤리적 사건이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삶에 대한 얘기 속에 죽음에 대한 얘기도 들어 있으며, 죽음을 분리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삶은 죽음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 되며,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삶에 대한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게 됩니다.